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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l Mar 24. 2023

시작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기적

"오직 너만을 생각한 밤이 있었어. 내가 정말 왜 이러는 건지. 아무래도 네가 좋아진 게 아닐까. 이게 바로 사랑인가 봐."

박기영의 노래 '시작' 가사처럼 내게도 오직 '당신' 만을 생각한 밤이 있었다. 18년 세월이 흐르면서 뜨거웠던 애정이 동지애 비스무리하게 변한 것처럼 느껴질 때면, 우리의 시작이 어땠었는지를 떠올리곤 한다.


"저 여자애는 내 꺼야. 내가 찜했어."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대학교 동아리에서였다. 그 남자의 말이 첫눈에 반한 고백이었건, 공표건, 또는 농담이었건 간에 소문은 돌고 돌아 내게도 전달 된 건 한 참 뒤였다. 당시 나는 여유가 없었다. 성직자의 딸이었기에 삶은 오롯이 내 것이 아니었다. 반주와 찬양 인도, 건물주와의 소송으로 공황장애를 앓고 있던 엄마, 10여년 목회에도 늘어나지 않는 성도 수로 인해 맘고생 하시던 아빠. 무거운 족쇄는 풋풋한 여대생의 발목을 그렇게 잡고 늘어졌었다.

"내가 좋은 사람 소개해 줄까?"

내게 고백했다던 남자의 생뚱맞은 소리를 접하고서야 정신이 확 들었다. 그제야 그가 떠나겠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되었고, 키다리 아저씨처럼 묵묵히 지키고 있던 그에 대한 내 믿음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되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었던 걸까? 무작정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2006년 9월, 그가 고백했다. 여자 친구가 되어 달라고. 그는 내가 목사의 딸이 아닌, 하나의 온전한 여자임을 알게 해 준 유일한 남자였다.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일주일 4만 원 용돈이 전부였던 내게 매일 밥을 사주었고 모든 일정을 존중해 주었다. 일요일에 데이트하지 못해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예배할 시간에 자기 일을 하면 된다고 말하곤 했다. 외박이 안되는 것도 이해해 주었고, 성도들 앞에서 늘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애썼던 가면을 벗어도 되었다. 편안한 사랑, 그것이 그가 내게 준 선물과 같은 일상이었다.




최근 남편과 크게 다투었다. 나는 감기에 걸려 아버님 기일에 못 갔고, 남편은 그 날 시댁과의 여행을 결정했다. 독박육아로 심신이 많이 지친 상태였다. 밤늦게 돌아온 남편에게 말이 곱게 나갈 리 없었다. 바가지를 긁었고, 남편은 여행일정을 조율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고스란히 폭격을 맞았다.

‘아빠 기일엔 안 오고 교회에는 가려고 하다니.’

다음날 서운한 마음이 컸는지 교회에 같이 가자는 내 말에 남편은 격하게 반응했다.

"이혼해!"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처음 멱살잡이를 당하다 보니 '이이가 원래 폭력적인 남자였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이를 데리고 혼자 교회에 가는 길, 눈물 젖은 손으로 운전을 했다. 이젠 끝이야.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마음 편할지도 몰라,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마침내 뒤엉켜 머리가 아팠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서로를 사랑했기에 다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죄 없는 우리 아이는 어쩌지? 내 지인들에게는 무슨 말을 하지? ….

남편도 사과를 쉽게 할 것 같지 않았고 난 예배가 끝난 뒤 도망치듯 친정으로 갔다. 친정 부모님은 늘 그랬듯 며칠 못 가 둘이 붙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다. 그러나 종일 휴대폰이 고장난 듯 남편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우리는 늘 하루가 지나기 전에 화를 풀곤 했다. 화해 말미에는 서로를 안아준다. 그런데 그날 밤은 달랐고, 그래서인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정이 떨어져 버린 걸까.


'내가 차를 가지고 친정에 와서 오늘 출근은 차도 없이 힘들었겠구나.'

월요일 아침, 문득 남편에 대해 걱정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참 그놈의 정이란 뭔지…. 멱살잡이에 패드립을 당하고도 참 질기고 질긴 사랑, 죽일 놈의 사랑이다. 그래도 다신 그런 행동 못하도록 절대 먼저 연락하지는 않으리라. 9시까지 육아하며 여느 때와 같은 시간을 보냈다. 6시께 두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그럼 그렇지.'

전화를 망설여야 하는데 내 손가락은 어느새 번호키를 누르고 있었다. 전화를 받는 남편의 음성은 아무 일 없었던 듯 무심했다. 남자친구 취업준비생 시절 소위 말하는 '동굴'에 들어가 나흘간 연락을 끊은 적이 있었다. 늘 다툴 때마다 며칠 되지 않아 연락하거나 찾아오는 남자였다. 이번엔 진짜 끝이라고 결심해도, 우린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가 눈송이처럼 사라지곤 했다. 둘 다 나사 빠진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콩깍지가 씌어서인지 모를 일이다.

"이혼한다며!"

"그건 네가 말한 거잖아. 나는 아이 곁에 평생토록 있고 싶어.”

자식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말에 속절없이 화가 풀렸다. 나는 폭력적인 행동이 싫고 무서워서 집에 안 간 거라고 말했다. 남편은 아버님 기일에 ‘놀다 왔다’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내 입장에는 여행계획 짜고 생일파티 한 것이 애도의 시간으로 보이진 않았고, 그가 아빠의 마지막을 입에 담은 것이 화가 났었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우리는 얘기 끝에 서로 사과를 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설명해 준 뒤,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초심을 잃지 말고’ 

매해 결혼기념일마다 받는 손편지에 어머님이 늘 써주시는 문구다. 다사다난한 결혼생활을 겪으며 초심이 흐려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의 시작을 떠올린다. 풋풋했던 대학생활을, 이별의 위기 속 끈질기게 만났던 연애기간을, 눈물로 얼룩졌던 결혼식을, 눈부셨던 하와이의 태양을, 첫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의 희열을. 그간의 추억으로 다져졌기에 안정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서로를 다 안다 생각하면 또 양파껍질처럼 새로운 면을 보고야 만다.

다시 만나서 어색함도 잠시, 금세 풀어져 버리고 말았다. 원래 폭력적인 사람은 아니야, 함께 한 오랜 세월이 말해 준다. 이번 일로 서로의 부모님에 관한 말 만큼은 조심해야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느 때처럼 서로를 안는 우리 사이에, 파고드는 곰살맞은 한 생명이 우리를 이어주고 있었다. 

"엄마는 내 거야." 하며,


"그때마다 나는 우리의 시작을 떠올린다." / 신혼여행에서 찍은 하와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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