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 꼬질꼬질한 손과 차창 밖의 안녕

제4부. 봄, 그리고 다시 만날 때까지

by Napolia

야속하게도 방학의 시계는 평소보다 두 배는 빨리 돌아갔다. 어느새 달력의 빨간 동그라미가 쳐진 날, '집으로 가는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종점 상회 안채는 분주했다. 할머니는 마법의 보따리를 싸고 계셨다. 신문지로 돌돌 만 참기름 병, 꾹꾹 눌러 담은 김장 김치, 셋째 삼촌이 몰래 챙겨준 토종 달걀 꾸러미까지. "가서 네 엄마, 아빠랑 나눠 먹어라. 깨지니까 조심하고."
나는 빵빵해진 가방을 메고 마당으로 나왔다. 운동화 끈을 매는데, 대문 밖에서 익숙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에헴, 흠."
똥장군이었다. 녀석은 평소처럼 러닝셔츠 바람이 아니라, 웬일로 때가 꼬질꼬질한 점퍼를 챙겨 입고 나와 있었다. 녀석은 발로 땅바닥만 툭툭 차며 내 눈을 피했다.
"야, 간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 가냐." 똥장군은 무심한 척 대꾸했지만, 녀석의 손은 주머니 속에서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버스 종점까지 걸었다. 겨울바람이 윙윙거렸지만, 춥다는 생각보다는 허전한 마음이 더 컸다. 종점에는 이미 시내로 나가는 10번 버스가 시동을 걸고 '그르릉'거리고 있었다.

"자, 타라." 할머니가 내 등 떠밀며 버스 계단을 가리켰다. 그때 똥장군이 불쑥 내 앞을 막아섰다. "야, 설(서울)뜨기. 손 내밀어 봐."
내가 손을 내밀자, 녀석은 내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탁 올려놓았다. 묵직하고 차가운 감촉. 자세히 보니 녀석이 가장 아끼던 '왕구슬'이었다. 반투명한 유리 속에 태극무늬가 영롱하게 박힌, 동네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탐내던 그 보물.
"너 이거..." "그냥 주는 거다. 서울 가서 이걸로 다 따먹어라."

녀석은 쑥스러운지 코를 쓱 문질렀다. 녀석의 손등은 겨울바람에 터서 거북이 등껍질처럼 거칠어져 있었다. 나는 그 꼬질꼬질하고 따뜻한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고맙다. 여름방학 때 또 올게." "오든가 말든가."
버스가 출발 신호를 알리며 기적을 울렸다. "오라이!" 안내양 누나의 목소리와 함께 버스 문이 닫혔다.
나는 제일 뒷좌석으로 달려가 창문을 열었다. 버스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뒷짐을 진 채 무덤덤하게 서 계셨지만, 그 옆에 선 똥장군은 버스를 따라오며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야! 잘 가라! 여름에 수박 서리 또 하자!"


녀석의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버스가 속도를 낼수록 똥장군도, 할머니도, 종점 상회의 낡은 간판도 점점 작아졌다. 마침내 버스가 모퉁이를 돌자, 장수동의 풍경은 흙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머니 속에서 왕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차가웠던 구슬이 내 체온으로 미지근해져 있었다. 버스 안에는 할머니가 싸주신 짐 보따리에서 흘러나온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차창 밖 풍경이 점차 낯선 회색 빌딩들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하얀 눈 덮인 논두렁과, 붉은 쥐불놀이 불꽃, 그리고 똥장군의 하얀 웃음이 겹쳐 보였다.
"이번 정류장은..."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지만, 내 마음은 아직 장수동 종점, 그 흙냄새 나는 평상 위에 머물러 있었다.




* 이미지 출처 : Created by 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