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겨울, 붉은색 온기
장수동의 겨울밤은 도시보다 훨씬 어둡고 깊었다. 가로등이라고는 버스 종점에 하나, 마을 어귀에 하나뿐이었으니, 해가 지면 세상은 그저 먹물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정월 대보름날만큼은 달랐다. 그날은 땅 위에도 붉은 달이 수십 개씩 떠오르는 날이었다.
"야, 분유 깡통 준비했냐?"
오후부터 똥장군은 분주했다. 녀석은 못과 망치를 들고 빈 깡통 바닥에 구멍을 숭숭 뚫었다. '탕, 탕, 탕!' 차가운 쇠 깡통에 구멍이 뚫릴 때마다 찌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녀석은 구멍 뚫린 깡통 주둥이에 굵은 철사를 매달아 손잡이를 만들었다.
"이게 공기가 잘 통해야 불이 활활 타오르는 거야. 기술이지, 기술." 똥장군은 내 깡통까지 점검해주며 전문가 행세를 했다.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했다. 우리는 논두렁에 모여 앉아 관솔(송진이 엉긴 소나무 가지)과 마른 장작을 깡통 안에 채워 넣었다.
드디어 사방이 캄캄해졌다. 동네 형들이 먼저 불을 붙였다. "자, 돌려라! 액운아 물러가라!"
우리도 질세라 깡통에 불을 붙였다. 관솔에 불이 붙자 매캐하면서도 향긋한 송진 타는 냄새가 확 퍼졌다. 우리는 깡통을 허공에 대고 돌리기 시작했다.
'윙- 윙- 윙-'
처음엔 불씨가 약하더니, 속도가 붙자 바람을 타고 맹렬하게 타올랐다. 내 손끝에서 시작된 불꽃이 허공에 거대한 붉은 원을 그렸다. 어둠 속에서 붉은 선들이 춤을 췄다. 똥장군의 불꽃 원은 크고 힘찼고, 내 것은 작지만 빠르게 돌아갔다.
"야! 내 거 봐라! 내가 제일 크다!" 똥장군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녀석의 얼굴이 불빛에 비쳐 붉게 물들었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논두렁 곳곳에서 아이들이 돌리는 수십 개의 불꽃이 장관을 이뤘다. 마치 도깨비들이 단체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팔이 아파지면 반대쪽으로 돌리고, 다시 팔을 바꿔 돌렸다. 깡통 안에서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와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들려왔다.
"던져!"
형들의 신호와 함께 우리는 돌리던 깡통을 하늘 높이 던져 올렸다. 붉은 혜성처럼 꼬리를 물며 날아간 깡통들이 논바닥에 떨어졌다. 쏟아진 불씨들이 마른풀에 옮겨붙었다.
논두렁 태우기가 시작된 것이다. "쥐야! 해충아! 다 타 죽어라!" 우리는 불타는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겨울내내 얼어있던 땅이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렸다. 타오르는 불길 너머로 셋째 삼촌과 동네 어른들이 막걸리를 마시며 웃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한바탕 불놀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옷에서는 탄내가 진동했고, 얼굴은 검댕으로 꼬질꼬질했다. 하지만 추위는 온데간데없고 온몸이 후끈거렸다.
"야, 오늘 진짜 끝내줬지?" 똥장군이 씩 웃으며 물었다. 녀석의 하얀 이만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어. 내년엔 깡통 두 개로 쌍불 돌리기 하자."
하늘엔 둥근 보름달이 떠 있고, 땅에는 우리가 남긴 불씨들이 별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그 붉고 뜨거웠던 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겨울의 한기도 깡통 속 불꽃과 함께 남김없이 타버렸다.
* 이미지 출처 : Created by 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