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겨울, 붉은색 온기
함박눈이 내린 다음 날, 장수동 국궁장은 거대한 슬로프로 변해 있었다. 평소라면 할아버지가 "어험!" 하고 서 계셨을 사대(활 쏘는 곳)부터, 화살이 꽂히는 과녁까지. 145미터의 거리는 하얀 눈으로 매끄럽게 포장된 미끄럼틀 그 자체였다.
"야, 이거 가져왔냐?" 똥장군이 묻자, 나는 허리춤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복합 비료'. 굵은 글씨가 박힌 누런 비료 포대였다.
우리는 국궁장 언덕 꼭대기에 섰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했다. 여름에는 저 끝이 보이지도 않았는데, 눈이 덮이니 마치 낭떠러지처럼 가팔라 보였다.
"준비물은 다 챙겼지?" 똥장군이 능숙한 솜씨로 비료 포대 안을 채웠다. 푹신한 지푸라기를 가득 채워 넣어야 엉덩이가 배기지 않고, 쿠션 역할을 해줘서 속도도 더 잘 났다. 녀석은 포대 입구를 노끈으로 야무지게 묶어 손잡이까지 만들었다.
"자, 간다! 비켜라!"
똥장군이 먼저 스타트를 끊었다. 녀석은 비료 포대 위에 배를 깔고 엎드리는, 일명 '슈퍼맨 자세'를 취했다. "이야압!" 기합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몸이 미끄러져 나갔다. 순식간이었다. 비료 포대는 눈보라를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멀어졌다.
나도 질 수 없었다. 나는 포대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발로 땅을 힘차게 밀었다. '슈욱-' 차가운 바람이 귓가를 때렸다. 처음엔 느릿하던 속도가 경사를 타자마자 급격히 빨라졌다.
"으아아아!" 비명이 절로 나왔다. 눈앞의 풍경이 하얀 선으로 뭉개져 지나갔다. 엉덩이 밑으로 울퉁불퉁한 눈길의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썰매 날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내 몸의 균형 감각으로 방향을 잡아야 했다.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평소 할아버지가 쏘아 보낸 화살이 날아가던 그 길을, 지금은 내가 화살이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바람 소리가 윙윙거렸다. 눈가루가 얼굴을 때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피해! 멈춰!" 먼저 도착해 있던 똥장군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하지만 멈추는 브레이크 따윈 없었다. 나는 그대로 과녁 앞 모래 언덕(무겁터)으로 돌진했다.
'쿠당탕!' 눈 더미 속에 처박히고 나서야 질주가 끝났다.
"푸하하! 야, 너 꼴 좀 봐라." 똥장군이 눈사람이 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내 머리며 눈썹, 콧구멍까지 눈이 가득 차 있었다. "죽인다... 진짜 빠르지 않냐?"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1분도 안 되는 짧은 비행이었지만, 그 짜릿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야... 다시 올라가자." 내려오는 건 순식간인데, 올라가는 길은 천 리 길이었다. 우리는 썰매(비료 포대)를 질질 끌고 145미터의 눈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한 번 타려고 이게 무슨 고생이냐." 투덜거리면서도 우리는 기어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몸을 던졌다. 오르고, 미끄러지고, 구르고, 다시 오르고.
해가 질 때쯤, 우리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 "야, 이번엔 기차다!" 똥장군이 앞장서고 내가 뒤에서 녀석의 허리춤을 잡았다. 2단 합체. 무게가 더해지니 속도는 두 배였다. 우리는 괴성을 지르며 눈 덮인 활터를 폭주 기관차처럼 질주했다.
어느새 바지는 눈에 젖어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일어나 걸으려니 바지가 '바스락'거리며 로봇 다리처럼 굳어 있었다. 손발은 꽁꽁 얼어 감각이 없었지만, 땀이 뻘뻘 났다.
"야, 재밌었다." "내일 또 타자."
우리는 젖은 비료 포대를 망토처럼 두르고 종점 상회로 향했다. 석양에 비친 국궁장에는 우리가 낸 썰매 자국이 화살표처럼 길게 그어져 있었다. 그날, 우리는 그 어떤 명사수가 쏜 화살보다 더 빠르고 멀리 날아갔다.
* 이미지 출처 : Created by 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