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 시끌벅적 장날과 할머니의 빨간지갑

제3부: 겨울, 붉은색 온기

by Napolia

김장독을 땅에 묻고 며칠 뒤, 할머니가 아침부터 분주했다. 장롱 깊숙한 곳에서 나프탈렌 냄새가 나는 털 코트를 꺼내 입으시고, 거울 앞에서 붉은 루즈를 꼼꼼하게 바르셨다.
"일어나라. 오늘은 장에 갈 거다."
장날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세수를 했다. 장수동 촌구석을 벗어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 구경을 가는 건 소풍만큼이나 설레는 일이었다. 똥장군은 밭일을 돕느라 못 간다고 입이 댓 발 나왔지만, 나는 녀석 몫까지 구경하겠다며 으스대며 나섰다.
우리가 탄 10번 버스는 장을 보러 가는 아줌마, 할머니들로 콩나물시루였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시장 입구는 그야말로 딴세상이었다.

"골라! 골라! 떨이요, 떨이!" "싱싱한 고등어가 왔어요! 살아서 팔딱거려요!"
상인들의 고함, 뻥튀기 기계의 '펑!' 하는 폭발음, 트로트 음악 소리가 뒤섞여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물결처럼 밀려다녔고, 코끝에는 비릿한 생선 냄새와 고소한 참기름 냄새, 달콤한 호떡 냄새가 번갈아 가며 훅훅 끼쳐왔다.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인파 속을 헤치고 나갔다. 종점 상회의 여왕답게 할머니의 걸음걸이는 거침이 없었다.
"이거 얼마요?" "아이고, 어머니. 이건 오천 원은 받아야지." "뭐가 그리 비싸? 삼천 원에 주쇼. 아니면 말고."
할머니의 흥정은 칼 같았다. 상인 아저씨가 울상을 지으며 "아이고, 남는 것도 없네" 하면서도 덤으로 콩나물 한 줌을 더 얹어주면, 그제야 할머니의 빨간 지갑이 열렸다. 나는 그 빨간 지갑이 열릴 때마다 마술 상자가 열리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자 내 양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다리가 아프고 배가 꼬르륵거릴 때쯤, 할머니가 나를 허름한 천막 식당으로 이끌었다.
"국밥 두 그릇 주소. 고기 많이 넣어서."
시장통 순대국밥집. 커다란 가마솥에서 하얀 김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뚝배기 안에서 보글보글 끓는 국물 위로 들깨 가루와 다대기(양념장)가 듬뿍 올라가 있었다.
"후루룩." 뜨거운 국물을 한 입 떠먹자, 시장통의 찬 바람에 언 몸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투박하게 썬 순대와 머릿고기가 입안 가득 씹혔다. 돼지 냄새가 났지만 역하지 않고 구수했다. 깍두기를 국물에 적셔 먹는 그 맛은, 장수동 밥상과는 또 다른 '바깥세상의 맛'이었다.
"많이 먹어라. 남자는 배가 든든해야 한다." 할머니는 당신의 뚝배기에 있는 고기를 건져 내 밥그릇에 얹어 주셨다. 무심한 듯 챙겨주는 그 젓가락질에서 할머니 특유의 투박한 정이 느껴졌다.

배를 채우고 나오는 길, 할머니가 신발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이거 신어봐라." 할머니가 고른 건 안감에 털이 복슬복슬한 털신이었다. "촌에서 뛰어다니려면 발이 따뜻해야지."
나는 새 털신을 신고 쿵쿵 땅을 굴러보았다. 폭신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나는 똥장군을 위해 붕어빵 한 봉지를 샀다. 식기 전에 녀석에게 갖다줘야 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 할머니는 피곤하셨는지 꾸벅꾸벅 조셨다.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내 발에 신겨진 새 털신과, 무릎 위의 붕어빵 봉지, 그리고 옆에서 조는 할머니의 로션 냄새. 시끌벅적했던 시장의 소음은 멀어지고, 버스 엔진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웅웅거렸다.
장수동의 겨울은 춥지만, 내 발끝과 배 속은 난로를 켠 듯 뜨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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