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봄, 그리고 다시 만날 때까지
쥐불놀이의 열기가 식고 나자, 장수동의 바람 끝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살을 벨 듯 날카롭던 칼바람이 무뎌지고, 그 자리에 비릿하고 축축한 흙내음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겨울이 녹아내리는 소리는 처마 밑에서부터 들려왔다. '똑... 똑... 똑...' 고드름이 녹아 떨어지는 규칙적인 박자. 그 소리는 마치 봄이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같았다.
"야, 설(서울) 뜨기! 빨리 와봐! 큰일 났어!"
아침부터 똥장군이 사색이 되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왜? 무슨 일인데?" "암탉이... 암탉이 이상해. 밥도 안 먹고 꼼짝도 안 해."
우리는 뒷마당 닭장으로 달려갔다. 셋째 삼촌이 이미 쭈그리고 앉아 닭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쉿. 조용히 해라. 지금 품고 있다."
암탉은 짚으로 만든 둥지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깃털을 한껏 부풀리며 "구구구!" 하고 사납게 경계했다. 눈빛이 평소와 다르게 독기가 서려 있었다.
"아픈 게 아니었네?" 똥장군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 녀석아, 알 품는 거다. 이제 곧 병아리 나온다." 삼촌의 말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병아리라니. 학교 앞에서 파는, 종이 상자에 담긴 병아리만 봤지, 알에서 깨어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닭장 앞을 보초 서듯 지켰다. 하루, 이틀...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암탉은 물 한 모금 마실 때를 빼곤 둥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고요하던 닭장 안에서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톡... 토독...' 무언가가 딱딱한 껍질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야, 나온다! 나온다!"
우리는 숨도 쉬지 못하고 철망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암탉의 배 밑에서 조그만 구멍이 뚫린 달걀 하나가 보였다. 구멍 사이로 노란 부리가 쉼 없이 껍질을 쪼고 있었다.
'파삭.' 껍질이 갈라지더니, 축축하게 젖은 털 뭉치가 굴러나왔다. 처음 본 갓 태어난 병아리는 생각보다 못생겼다. 털은 젖어서 볼품없었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비틀거리며 어미 품을 파고드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반나절이 지나고 털이 보송보송하게 마르자, 녀석들은 마법처럼 변했다. 노란 민들레 홀씨 같은 솜털, 까만 콩 같은 눈, 앙증맞은 부리. "삐약, 삐약." 그 소리는 겨우내 얼어붙었던 내 마음을 간지럽히는 봄의 노래였다.
"자, 만져봐라." 삼촌이 병아리 한 마리를 꺼내 내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다. 손바닥 위에서 콩닥거리는 작은 심장 박동이 내 혈관을 타고 전해져 왔다. 솜사탕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감촉. 나는 행여나 녀석이 다칠까 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야, 얘는 벼슬이 좀 큰 게 수탉 같다. 이름은 '천하장사'로 하자." 똥장군은 벌써 병아리 감별사가 된 듯 너스레를 떨었다. "웃기지 마. 다 똑같이 생겼구만."
우리는 병아리들에게 모이를 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미 닭이 "구구" 하고 부르면, 노란 솜뭉치들이 "삐약" 하며 쪼르르 달려가는 모습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저녁 밥상에는 향긋한 냄새가 올라왔다. 할머니가 언 땅을 뚫고 나온 쑥을 캐다가 끓인 도다리쑥국이었다. "봄 쑥은 보약이다. 국물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후루룩 국물을 들이키자, 입안 가득 흙냄새와 쑥 향기가 퍼졌다. 밖에서는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느라 낮은 소리로 울고, 방 안에서는 구수한 쑥국 냄새가 진동했다.
"할머니, 나 봄방학 때 또 와도 돼요?" 내 물음에 할머니가 숟가락을 멈추고 피식 웃으셨다. "오냐. 올 때 병아리들 줄 과자 부스러기나 챙겨 와라."
창문 밖으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노란 병아리와 초록색 쑥국. 장수동의 봄은 그렇게 따뜻한 색깔로 내 기억 속에 칠해지고 있었다.
* 이미지 출처 : Created by 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