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막. 마음속의 풍경화
세월은 버스 바퀴보다 빨랐다. 흙먼지 날리던 비포장도로는 매끈한 아스팔트로 덮였고, 소달구지가 지나던 논두렁 위에는 아파트 숲이 들어섰다.
나는 어른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방학을 기다리며 손꼽아 날짜를 세지도 않고, 10원짜리 동전 하나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지도 않는다. 내 손에는 잠자리채 대신 서류 가방이, 고무신 대신 구두가 들려 있다.
어느 늦은 오후, 나는 홀린 듯 다시 장수동을 찾았다. '종점 상회'가 있던 자리는 편의점으로 바뀌어 있었고, 우리가 뒹굴던 갯벌 근처에는 거대한 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오라이!"를 외치던 안내양 누나도, 하얀 모시옷을 입고 활을 쏘던 할아버지도, 붉은 루즈를 바른 우리 할머니도 이제는 그곳에 없었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나는 여전히 그곳에 서 있다.
편의점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에서 미닫이문의 '드르륵' 소리를 듣는다. 아스팔트 열기 속에서 비릿한 흙내음과 쑥국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퇴근길 만원 버스의 소음 속에서, 차체를 '탕탕'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를 듣는다.
내 책상 서랍 깊은 곳에는 아직도 낡은 왕구슬 하나가 굴러다닌다. 똥장군 녀석이 이별 선물이라며 무심하게 쥐여줬던 그 구슬. 가끔 삶이 고단하고 팍팍하게 느껴질 때면, 나는 그 차가운 유리 구슬을 손바닥 위에서 굴려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손바닥에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녀석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아마 어디선가 씩씩하게, 그 특유의 하얀 이를 드러내며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쏘아 올린 쥐불놀이 불꽃처럼 뜨겁게.
장수동의 추억은 내게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걸려 있는, 빛바래지 않는 풍경화다.
그 그림 속에는 언제나 뜨거운 여름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원두막에서는 셋째 삼촌이 수박을 쩍 쪼개고, 똥장군은 흙투성이가 된 채 나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종점 상회 평상에는, 여전히 할머니가 부채를 부치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왔냐? 덥지 않냐?"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한다. 네, 할머니. 저 왔어요. 여기는 여전히 따뜻하고, 배부르고, 근사하네요.
나의 유년은 그곳에서 영원히 멈추지 않는 방학을 보내고 있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유년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들이 아스라이 흩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워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글을 써 내려갈수록 서서히 흐려지던 지난날의 풍경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흙먼지 날리던 버스 종점, 매캐한 연탄 냄새, 달빛 아래 서리하던 수박밭, 그리고 땀 냄새가 진동하던 골목길의 열기까지 말입니다.
기억의 복원은 가슴 벅찬 기쁨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아름다운 시절을 함께했던 친구들을 향한 짙은 그리움을 불러왔습니다.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떤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환하게 웃던 그 까무잡잡한 얼굴들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소설의 형태를 빌려 어린 날의 수기를 기록하는 매일매일이 진심으로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이제 긴 연재의 마침표를 찍으며, 제 마음속 영원한 단짝이자 골목대장인 '똥장군'을 떠나보내려 하니 못내 아쉽고 또 아쉽습니다.
언젠가 제 삶의 어느 길목에서 또 다른 '똥장군'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약하며, 길었던 장수동에서의 방학을 이제 마칩니다.
그동안 흙먼지 냄새나는 투박한 이야기에 기꺼이 동행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이미지 출처 : Created by 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