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여름, 초록색 야생
병아리들이 제법 털갈이를 하고 중닭 티를 낼 무렵, 장수동의 공기는 설탕물이라도 뿌린 것처럼 달달해졌다. 마을 뒷산이고 앞산이고 온통 하얗게 뒤덮인 아카시아꽃 때문이었다.
바람이 한 번 훅 불면, 코끝이 아찔할 정도로 진한 꽃내음이 밀려왔다. 그 냄새는 교실 창가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나를 자꾸만 엉덩이가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주말이 되자마자 가방을 던져두고 장수동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왔냐? 냄새 기가 막히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똥장군이 코를 벌름거리며 나를 맞았다. 녀석의 입가에는 이미 노란 꽃가루가 묻어 있었다. "야, 산에 올라가자. 지금이 딱 맛있을 때다."
우리는 뒷산 초입으로 향했다. 나무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하얀 꽃송이들이 마치 팝콘 같았다. 똥장군은 원숭이처럼 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를 휘어잡았다. "자, 받아라! 이게 자연산 사탕이다!"
녀석이 꺾어준 꽃가지에는 하얀 꽃들이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있었다. 먹는 법은 간단했다. 꽃잎을 한 움큼 쥐고 입안에 털어 넣거나, 꽃송이를 하나씩 따서 끝부분의 꿀샘을 쪽쪽 빠는 것이었다.
"음, 달다!"
꽃송이를 씹자 향긋한 풀 냄새와 함께 미미하지만 확실한 단맛이 혀끝을 감돌았다. 도시의 슈퍼에서 파는 알사탕처럼 자극적이지 않지만, 질리지 않는 은은한 단맛. 우리는 나무 그늘에 앉아 염소처럼 아카시아꽃을 훑어 먹었다.
"야, 이거 잎파리로 가위바위보 할래?" 배가 좀 차면 우리는 아카시아 잎 줄기를 하나씩 뜯었다. 손가락으로 잎을 튕겨 떨어뜨리는 놀이. "이겼다! 딱밤 맞아라!" 숲속은 우리의 웃음소리와 '윙윙'거리는 벌 소리로 가득 찼다.
그런데 그 '윙윙' 소리를 무시한 게 화근이었다. 욕심이 생긴 나는 가장 높고 탐스러운 꽃송이를 따려고 손을 뻗었다. 하얀 꽃잎 사이에 숨어 있던 노란 꿀벌 한 마리가 내 손가락 침입에 화들짝 놀라 꽁무니를 들이밀었다.
"악! 따가워!"
손가락 끝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며 손을 터니 벌은 이미 도망가고, 검지 끝이 풍선처럼 부어올랐다. "어이구, 이 바보야. 벌 밥을 뺏어 먹으니까 쏘이지."
똥장군은 혀를 차면서도 나를 데리고 급히 종점 상회로 뛰었다. 할머니는 내 퉁퉁 부은 손가락을 보더니, 된장독 뚜껑을 여셨다. "가만있어라. 된장 바르면 낫는다."
할머니는 짭짤하고 구수한 냄새가 나는 된장을 손가락에 듬뿍 발라주셨다. 의학적인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하게도 된장의 서늘한 기운이 화끈거림을 잡아주었다.
"쯧쯧, 꽃 따 먹다 벌한테 쏘이고, 가지가지 한다." 할머니는 핀잔을 주면서도, 부엌에서 시원한 설탕물을 타 오셨다.
나는 된장 바른 손가락을 쳐들고, 한 손으로는 설탕물을 마셨다. 입안에는 아카시아 향기가, 손가락에는 된장 냄새가, 그리고 목구멍으로는 달달한 설탕물이 넘어갔다.
마루에 앉아 바라본 장수동 뒷산은 여전히 하얀 꽃구름을 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비가 우수수 떨어졌다. 아프고, 달콤하고, 향기로운 초여름의 맛. 내 열두 살의 5월은 그렇게 아카시아 향기 속에 푹 절여지고 있었다.
* 이미지 출처 : Created by 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