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만국기가 펄럭이는 가을 운동회

제2부: 가을, 황금빛 포만감

by Napolia

매미 소리가 뚝 그치고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하자, 장수동의 하늘은 풍선처럼 높이 부풀어 올랐다. 학교 운동장에는 며칠 전부터 하얀 석회 가루로 선이 그어졌고, 아이들의 마음도 덩달아 들썩거렸다. 일 년 중 가장 시끄럽고, 가장 배부른 날. '가을 운동회'가 돌아온 것이다.
운동회 날 아침, 학교 정문 들어서는 길부터가 장관이었다. 하늘에는 알록달록한 만국기가 빨랫줄에 걸린 채 펄럭이고 있었고, 운동장 한가운데서는 스피커가 찢어질 듯 행진곡을 토해내고 있었다.
"야! 설(서울)뜨기! 너 무슨 팀이냐?"
저 멀리서 똥장군이 달려왔다. 녀석의 이마에는 하얀 머리띠가 묶여 있었다. "나? 나 청군인데." 나는 파란 머리띠를 보여주었다. "잘됐다. 오늘 너 죽었다. 우리 백군이 다 쓸어버릴 거니까." 똥장군은 코를 쓱 문지르며 선전포고를 했다. 우리는 오늘만큼은 적이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응원 소리가 운동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콩주머니(오자미)를 던져 박을 터뜨리는 게임이 시작됐다. '퍽, 퍽, 퍽!' 수백 개의 콩주머니가 허공을 날았다. "터져라! 터져라!" 마침내 '쩍' 소리와 함께 백군의 박이 먼저 터졌다. 박 속에서 '점심 맛있게 드세요'라고 적힌 현수막과 함께 꽃가루가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싸! 우리가 이겼다!" 똥장군이 펄쩍펄쩍 뛰며 나를 놀렸다. 나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사실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온통 '점심시간' 생각뿐이었으니까.
드디어 기다리던 점심시간. 학교 운동장 가장자리,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는 돗자리들이 형형색색으로 깔렸다. 우리 가족도 명당자리를 잡았다. 할머니, 둘째 숙모, 그리고 셋째 삼촌까지 총출동했다.
"우리 강아지들, 고생했다. 많이 먹어라."
할머니가 보자기를 풀자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속이 꽉 찬 김밥, 삶은 달걀, 그리고 특별히 장만해 온 삶은 밤과 고구마. 우리는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운동장 바닥에 앉아 김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모래가 좀 씹히는 것 같았지만, 그까짓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 사이다도 마셔라." 둘째 숙모가 병 사이다를 따서 건네주었다. 김밥으로 꽉 막힌 목구멍을 톡 쏘는 사이다가 뻥 뚫어주었다. "크아, 죽인다." 옆에서 똥장군도 볼이 미어터져라 김밥을 씹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녀석은 적군이었지만 밥 먹을 땐 식구였다.)

오후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달리기'였다. 출발선에 선 아이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탕!' 화약 총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튀어 나갔다.
똥장군은 빨랐다. 녀석은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이 벗겨져 날아갔는데도, 맨발로 운동장을 질주했다. "와아아! 똥장군 잘한다!" 녀석은 압도적인 차이로 1등을 차지했다. 결승선 테이프를 끊고 나서야 녀석은 흙투성이가 된 발을 보며 헤헤 웃었다. 손등에 찍힌 1등 도장. 그 파란 도장 자국이 훈장보다 빛나 보였다.
나도 이를 악물고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찼지만, 응원석에서 할머니가 부채를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결과는 2등. 똥장군만큼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공책 세 권이라는 전리품이 주어졌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만국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운동장은 파장 분위기였다. 아이들의 얼굴은 흙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꼬질꼬질했지만, 표정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야, 설(서울)뜨기. 이거 봐라. 공책 다섯 권이다." 똥장군이 전리품을 흔들며 자랑했다. "그래, 너 잘났다. 발바닥 안 아프냐?" "아프긴. 이게 영광의 상처지."
우리는 셋째 삼촌의 리어카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덜컹거리는 리어카 위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여전히 파랬고, 내 주머니 속 공책에서는 새 종이 냄새가 났다.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고, 배 터지게 먹고, 원 없이 달렸던 하루. 장수동의 가을은 그렇게 흙먼지 냄새와 함께 깊어가고 있었다.



* 이미지 출처 : Created by 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