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 무던하게

by 빈칸센

집으로 돌아와 집안일을 한다. 양념이 굳은 배달 용기는 뜨거운 물에 불려 놓고, 내일 먹을 도시락을 만든다. 먹다 남은 김치찜이 가위날에 숭덩숭덩 잘도 잘린다. 분명 돼지고기 김치찜인데 고기의 양이 퍽 적었다. 이러고도 만원이 넘나, 물가를 실감하며 남은 양념과 밥을 한데 볶는다. 내일 점심은 돼지고기 김치볶음밥이다. 계란 프라이도 빼먹지 말아야지. 소비기한이 3일 남아 빨리 처리해야만 한다. 먹다 남은 단무지와 미리 만들어둔 진미채까지 용기에 담아 도시락 뚜껑을 야무지게 닫는다. 바닥의 먼지를 쓸며, 오늘의 시작점인 오래된 친구와의 약속부터 다시 돌려 본다.


언제나 그러하듯, 예상치 못한 때에 오는 메시지. 약속을 잡는 데는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가능한 시간, 장소를 정한다. 나의 유구한 취향과 부천에 사는 그와 만날 때는 보통 망원, 합정, 상수 쪽으로 갔었다. 거리, 취향을 고려한 가장 합리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서울에 살지 않았을 때에도 자주 만나던 곳이었다. 잊었던 추억이 많구나 새삼 느끼면서, 오늘은 나의 집으로 그를 불렀다. 부천에서 잠실새내는 멀지 않냐고 물어보니, 별 감흥 없이 합정이나 잠실이나 서울인 건 매한가지라 말했다. (경기도 사람들은 정말 신기하다. 거리가 꽤 다른데..)


“아아 그럼 오키” 대수롭지 않은 대답으로도 대화가 되는 사이, 우리는 2016년 광주의 군부대에서 만났다. 선임과 후임. 반년의 간극을 두고 입대했지만 ‘지금’을 함께 하는 영광을 함께 했다. 특별한 이야기 조각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서로 잘 까고? 서로 코드가 맞았던 것뿐. 적어도 나는 그렇게 여겼고, 그 무심함이 인연 연장의 비결이라 생각한다. 그는 어떨지 모르겠다만.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는 1년 9개월의 시간 동안 얻은 소중한 것 중 하나다. 그 시절을 함께 했고 함께 떠올릴 사람과 연락함이 감격스럽기 때문에.


그는 커피 두 잔과 티라미수 하나를 사들고 왔다. 적당한 센스와 매너가 있는 친구, 만나면 늘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나는 하고 싶은 말과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 항상 미안함을 갖고 있는데, 그는 정말 잘 듣고 반응해 주었다. 모든 일들에 유난 떠는 나와는 달리 참 묵묵하고 단단한 친구. 군 생활 때는 전역, 복학 후에는 대학생활과 취업 그리고 지금은 각자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리.. 8년이 흘러 서른이 되어 버린 우리지만, 여전히 그때의 풋풋한 순간에 머물러 있는 듯해서 참 좋았다. 하나의 단어가 꺼내지기 전에는 말이다.


나 내년에 결혼해 대수롭지 않게, 너답게 하는 말.

‘찰칵’ 멈춰 있던 시계가 움직이는 소리.

오래 만난 여자친구의 존재를 알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마냥 축하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만나, 인연을 만들어 약속하는 건 얼마나 멋지고 용감한 일인가. 너무나 응원하지만 그 뒤편에 남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 외로웠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이후 대화에 집중하기가 유독 어려웠다. 분명 많은 말을 뱉어 냈는데.. 이미 중요하지 않게 돼버린 것 같다. 허한 마음이 든다고 그랬다. 친한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듣는 날은. 나는 다를 줄 알았는데, 있는 힘껏 응원해주고 싶었는데.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어. 그게 마음에 걸려.


망설이는 사이 시계가 움직인다. 집으로 가야만 하는 친구를 지하철역까지 배웅해야 한다. 먼 길을 와준 그에게 걸어서 10분 거리는 우스운 일. 겨울이라 날이 춥다. 입김을 불어 허공에 뱉는다. 순식간에 흩어지는 딱한 것을 보다 늘 그렇듯 네 컷 사진기에 오늘을 남겨 둔다. 이 시간도 허공으로 자라 질까 증거를 남겨 두는 우리. 쭈뼛쭈뼛 거리는 두 남자, 포즈랄 것도 없기에 마음에 드는 4장을 골라 바로 출력해 본다. 분명 둘 중 한 명은 쓸쓸한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서둘러 주머니에 넣고 지하철역 입구에 도착했다.


조심히 가라. 여름에 보자. 늘 그렇듯 간결한 인사

무던한 표정으로 마무리 짓는 두 친구.

그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다시 입김을 불어 본다.

오늘이 참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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