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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고구마와 손톱

by 나탈리

갓 구워 낸 군고구마처럼, 건조기에서 갓 꺼낸 세탁물들은 따끈따끈하다. 이곳에서 일한 지도 거진 일 년.

맨손으로 따끈따끈한 옷들을 만지다 보니 열 손가락에도 차츰 직업병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열기에 약한 손가락마다 피부 표피가 벗겨지고, 손톱 끝은 채 길기도 전에 부러지고 갈라지곤 했다. 특히 검지 손톱은 열기에 구워진 듯 색깔마저 누렇게 변한 데다가, 왼쪽 검지는 거기에 한 술 더 떠 손톱 밑의 살이 들고일어나 손톱을 위로 밀어 올리는 형국이다.


‘불쌍한 내 손톱! 주인을 잘못 만나 네가 고생이로구나.’

피부과도 가 보고, 동료처럼 매니큐어나 영양제도 써 보았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한 번은 주방용 니트릴 장갑을 몇 장 가지고 가서 착용을 하고 작업을 시도해 보았다. 그런데 장갑의 표면이 까슬까슬하여 섬유와

따로 노는 탓에 속도가 나지 않아 포기, 다시 맨손작업으로 돌아가야 했다. 자꾸만 하얗게 일어나는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고심 끝에 니트릴 장갑을 뒤집어 사용해 보았다.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80프로 정도. 그런데, 니트릴 장갑은 착용감은 좋고 맨손만큼 속도도 얼추 낼 수 있었지만, 오래 착용하면 습기가 차고, 끼고 벗기가 너무 번거로워, 20프로의 부족분을 대체할 만한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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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쳇 지피티 작품 중 일부분을 편집하여 올림

‘맞다, 자전거 라이딩용 장갑이 있었지. 왜 진즉 이 생각을 못했을까.’

서랍 한 구석에서 잠자던 장갑을 떠올린 건 한참이 지난 후였고, 사용해 보았더니 역시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나일론 소재의 라이딩용 장갑은 니트릴 장갑에 비해 공기도 잘 통하고 착용감도 일의 속도감도 만족할 만했다. 실로 대발견이라 할 수 있었다. 섬세한 손길을 요할 때는 니트릴 장갑, 보통 수준의 작업이면 라이딩 용 장갑, 고무장갑 속에는 두터운 면 장갑. 이렇듯 세 종류의 장갑을 번갈아 착용하며, 손 보호에 극성을 부린다 눈총(기분 탓인지도......)을 받으며, 순간순간 민첩성을 잃지 않으려 난리도 아닌 상황이 날마다 연출된다.


그래도 아무런 도치도 취하지 않을 때보다는 나은 듯싶으니, 이제 느긋하게 손톱이 온전히 회복되기만

기다리면 될 것 같다. 손톱 밑 ‘거대한 세력들의 반항’이 순해질 때까지 조심스레 손톱깎이로 잘라주면서.

군고구마 껍질을 벗길 때에도, 따끈따끈한 옷가지들을 대할 때에도 적당한 예우가 필요하다. 무작정

덤벼들다간, 손톱 밑이나 손가락 끝이 먼저 뜨거운 맛을 '제대로' 보고 입천장 또한 홀라당 날아가버린다.

뜨거운 맛 모두가 피부에는 난적이니 적당한 보호장비가 필요하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깨달음이지만,

모든 신체가 다 그러하듯 손가락은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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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이가 튼튼한 어르신은 날마다 세면 수건의 솔기를 물어뜯으시고, 한 어르신의 앙증맞은 보따리는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세탁물에서는 한동안 뜸하던 휴지 쪼가리가 다시 나온다. 숨기려는 어르신,

찾아내려는 요양보호사 님들. ‘꼭꼭 숨어라, 절대로 못 찾게!’ 아마도 어르신들은 이런 주문을 외우실지도

모른다. 요양보호사 님들도 이에 질세라 바지의 주머니란 주머니는 온통 혓바닥처럼 밖으로 내밀어져

있는데, 그래도 어디선가 휴지는 나온다.


숨기려는 자, 찾으려는 자,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까? 가만 생각해 보면, 휴지에 집착하는 어르신들의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소유하는 물건이 그리 많지 않은 처지에, 필요할 때 휴지라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를, 어르신들은 간절히 원하시는 게 아닐까? 예기치 않게 나오는 침과 눈물과 콧물을 닦을 수

있는 휴지를 어딘가 당신만의 장소에 저장해 두어야 안심이 되는......

또 엉망이 된 베갯잇 속을 보면 요양보호사 님들이 측은한 생각도 든다. 무슨 보물찾기 하는 것도 아닌데,

덥고 바쁘고 힘든 어르신들 목욕 시간에 일일이 검사를 하는데도 어딘가에 꽁꽁 숨어있다 나오는 휴지를

무슨 수로 찾아낼까. 궁예처럼 관심법을 지닌 게 아니라면, 투시안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도저히 수행하기

힘든 미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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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근무 시에는 휴지가 나왔으니 조심해 달라 살짝 귀띔을 해주는 정도로 넘어가는데, 동료 샘과 같이

일하는 날 휴지 사건이 벌어지면, 반드시 사진을 찍어 주임에게 보고하라는 샘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졸병으로서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휴지 말고도 세탁물에서는 가위, 핸드폰, 달력, 브로치, 화투, 색칠놀이용 그림다발, 손거울, 머리핀, 팔찌

등등 별의 별것이 다 나온다. 예전에는 현금뭉치도 나와 그야말로 돈세탁까지도 다 해 보았다는 얘기를

동료에게 들었다. 그 후로 어르신들의 개인 소유 현금은 관리를 따로 해서, 더는 돈세탁 할 일은 없어졌다고 했다.


와, 대박! 돈세탁까지 다 하시다니. 아무나 못 하는 돈세탁을...... 센터의 산 증인
이십니다.

불현듯 옛 기억 한 자락이 떠올랐다. 모 대형병원 세탁실에서도 환자복 주머니에서 도르르 말린 현금이

심심찮게 발견되었다. 관리자에게 가져다주는 게 원칙이었지만, 주인을 찾아주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라, 세탁된 자잘한 현금은 관리자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갈 거라는 소문만 무성했다. 그 당시에도

종잇장처럼 납작하게 찌그러진 핸드폰이 빨래 사이에서 나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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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의 정갈한 요양생활을 위해 하루하루 수를 놓듯, 물 흐르듯 보내온 시간들. 환의는 소량이고 거의

일반 옷들이라, 옷의 스타일이나 무늬, 크기만 보아도 대충 어르신의 이름을 알아맞힐 정도가 되었다. 젊은이 못지않게 세련되고 멋스러운 스타일, 작고 몸에 꼭 끼는 데님, 화려한 원피스, 아가들 옷처럼 작고 귀여운

티셔츠 등, 패션의 산 주소가 따로 없다.

일 년 한 바퀴를 돌아 삼복더위의 정점에 달하는 날, 조촐하게 파티라도 해야겠다. 일주일만 더 하면 일 년!

세월 참,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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