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야 토끼야 산속의 토끼야
겨울이 되면은 무얼 먹고 사느냐
흰 눈이 내리면은 무얼 먹고 사느냐
겨울이 되어도 걱정이 없단다
엄마가 아빠가 여름 동안 모아논
맛있는 먹이들이 얼마든지 있단다
강소천 작사 권길상 작곡의 동요, 산속의 토끼야입니다. 어렸을 적 자주 불렀던 동요지요.
찬바람 불어오니 간결한 가사가 더더욱 심금을 울리는 요즘, 가을이라고는 하나 사람들의 옷차림은 벌써
한겨울입니다. 패딩에 모자에 머플러까지, 추위를 막기 위한 갑옷을 두둑이 갖춰 입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그래도 젊은이들의 옷차림은 확실히 장년이나 노년층에 비해 가벼워 보입니다. 발목과 목을 훤히 드러내고
다니는 그들에게 경탄의 시선을 보내어 봅니다. 옛 어르신 같으면 한 말씀 던지실 것 같아요.
“닭이 맨발 벗고 사니 오뉴월인 줄 아느냐? 뼈에 찬바람 들어가면 골병들어 이것들아!”
찬바람에 옷깃을 여밀 때마다 늘 떠오르는 동요를 읊조리다 보면, 가느다란 사다리 하나가 눈앞에 살포시
펼쳐집니다. 하염없이 사다리를 올라가지요. 시름에 겨운 어깨의 엄마가 나를 맞아줍니다. 엄마는 새끼들에게 줄 먹이를, 여름 동안 모아놓지 못하시어 겨울만 오면 걱정이 태산이셨죠. 엄마의 염려는 제게도 감염되어,
나란 존재가 엄마의 짐을 덜어줄 수 있는 길은 뭐 없을까, 고민을 하였더랍니다. 엄마 속 상하실 테니 될 수
있는 한 뭐 해 달라거나 사 달라고 조르지 말자, 이러고 쓸데없이 철이 일찍 들어버린 것 같습니다. 철이 일찍 들어버린 아이는 동요 속 토끼들처럼 밝게 노래하지 못했지요.
그래서일까요? 포근함, 안온함, 훈훈함을 압도하는, 뜨거운 감정의 용솟음 같은 것이 어른이 된 지금도 토끼 송의 감상을 막더란 말입니다. 토끼 같은 자식들과의 생존을 위해, 장독대의 항아리마다 그득그득한 김장,
쌀 몇 가마(그때는 정부미라도 감지덕지했습니다), 처마까지 맞닿는 장작 벼늘, 헛간 가득 땔감을 채워놓지
않는 한, 엄마의 겨울은 언제나 시리고 한숨이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엄마랑 아빠가 여름 가을 동안 열심히 먹이를 모아, 겨울 양식 걱정이 눈곱만치도 없는 아기토끼들은 차암
행복하기도 하겠다. 토끼에게 무얼 먹고 사느냐고 묻는 화자. 다정다감하나 걱정이 많은 것이 꼭 누구(?)랑
비슷하단 말이지. 어깨를 펴 보이며, 난 아무 걱정 없으니 돈 워리, 비 해피를 구사하는, 구김살이 없는
토란이 토순이들아, 동요 속이지만 너희들이 매우 부러웠구먼......
괜스레 마음이 분주합니다. 김장, 겨울맞이 대청소, 옷장 정리까지 마쳐야 겨울을 잘 맞이할 수 있을 텐데.
휴일만 되면 마음과 달리 몸의 움직임은 느려집니다. 긴장감이 없어진 탓입니다. 긴장감이 없으면 없는 대로, 하나씩 차근차근 해 나가면 될 것을, 여전히 마음은 저만치 앞장서 걸으며 성과를 독촉해대네요. 그러니 쉬어도 왠지 불안하고, 무언가를 해야 하는 의무감에서 오는 피로를 떨치기가 힘든 지경이 되지요. 주부로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는 쉼이란 게 가능할까요? 쉬는 날이라도 온전히 쉴 수가 없으니, 그냥 일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바지런히 겨울 양식을 비축하는 엄마 아빠 토끼처럼요.
가만, 그러고 보니 어느새 창립 기념일(결혼기념일)이 지나버렸습니다. 우리 가족 주식회사를 창립한 지,
어언 삼십 하고도 이 년이 흘렀네요. 호사스럽게 기념일 따위 챙기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었어요. 요즘은
사귄 지 백일이니 천일부터 시작하여 기념일이란 기념일을, 일부러 만들어가며 재미나게 사는 모양이던데.
무슨 날인가를 기념한다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우리. 창립 기념일을 모르고 지났다 하여 큰일 난 것은 아니지만, 일말의 서운함마저 없을 수는 없겠지요.
그동안 두 명으로 시작한 우리 가족 주식회사는 사원 수 네 명으로 두 배가 성장하였고, 방 한 칸 전세에서
출발하여 세 칸 자가로 발전을 하였습니다. 재테크에 눈을 뜨지 못해 상급지로 터전을 옮기진 못했지만,
역세권이라는 점에 위로를 얻어 봅니다. 현재 사원 1은 재교육 중이고, 사원 2는 워홀을 다녀와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간과 쓸개와 콩팥일랑 다 내어놓고 적응하는 중입니다.
공동 창립자인 두 남녀는 긴 세월 동안 서로 동화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물과 기름처럼 겉돌지도 않은 상태로 한 곳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가는 중이랍니다. 창업 초기, 회사 경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크고 작은 다툼도
심심찮게 일었지만, 지금은 다툴 여력도 없는지 잔잔한 호수처럼 대체로 조용합니다. 어깨를 겯고 측은지심
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지혜를 터득한 탓인지, 이기고 지는 것도 다 부질없음을 느낀 탓인지, 동업자이자
친구처럼 남은 여정을 자박자박 걸어갈 뿐입니다. 아가 토끼들에게 훈훈한 겨울을 안겨주기 위해, 역시
동업하길 잘했어, 승리의 개가를 부를 그날까지, 그 걸음은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