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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섬결 생각

출근길의 홍두깨

by 나탈리


“제발, 도와주세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오늘 처음 봐요.”

어느 남성의 다급한 외침! 인접한 열차 칸에서 무슨 실랑이가 벌어지는 모양이다. 수많은 눈동자가 그리로

쏠리지만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려 들지는 않는다. 토요일 출근길, 지하철이 잠시 정차한 사이에 벌어진 사건으로 지하철 내부의 공기는 무겁게 출렁거렸다. 다들 눈살을 찌푸린 채 사건의 추이를 관망만 하고 있다.

열차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이 입구 쪽에서 한참 실랑이를 하더니 이쪽 출구로 다시 들어온다. 잘 차려입은

젊은 여성이 남성의 멱살을 목 뒤쪽으로 움켜잡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들어왔다. 너무도 태연자약한 표정이다.

“아무나 신고 좀 해 주세요. 저 오늘 이 아저씨한테 몇 대 맞았는지 몰라요.”


그러더니 한 손으로는 멱살을 잡은 채로 나머지 한 손으로 112에 손수 신고를 하는 그 여자. 손아귀 힘이 엄청 센지 한 손으로 제압하고 있는데도 남성은 옴쭉달싹도 못하고 버둥거리기만 한다. 보기에 딱했지만, 무섭고 겁나는 상황이라,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기는 매한가지일 것이었다.

‘무슨 일일까? 성추행 사건인가? 저 남자분이 파렴치한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스스로 묻고 답하고 살피기에 여념이 없는 소심녀.


KakaoTalk_20251220_114952358.png Gemini 작품


“무슨 여자가 힘이 저리 세?”

“저 여자, 운동한 여자가 분명해.”

어디선가 누군가가 수군거리는 소리.

“도와주세요. 누가 이 사람 좀 제게서 떼어내 주세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오늘 처음 봤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그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치는 것이지만 상대 여성을 당해낼 수가 없는 모양이다. 여성은 다시 멱살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고, 때마침 제3의 젊은 남성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열차가 출발해야 하니 경찰서에 가서 해결합시다.”

그제야 깊은숨을 몰아쉬는 열차 안 승객들. 궁금함일랑 뒤로 하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 출근 전쟁에서

승리를 해야 하기에.


“출근길에 웬 날벼락이람!”

“저 여자 좀 이상한 여자야. 괜스레 올가미를 던진 거야. 그 여자가 좀 전에 내 맞은편에서 걸어오더니, 갑자기 어깨를 홱 틀며 나랑 부딪히려 하는 것을 간신히 피했거든? 근데 저 남자는 피하지 못하고 봉변을 당하네.”

저만치 한 중년의 남성이 맞은편의 지인에게 브리핑을 하는 것을 듣자, 소름이 확 돋았다. 멱살잡이 여성의

입가를 감돌던 냉소가 연신 마음에 걸리며, 희생양이 된 것으로 보이는 남성에게 깊은 연민이 가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독거미가 쳐 놓은 거미줄에 운수 사납게도 걸리고 만 그. 날갯짓을 하면 할수록 거미줄은 그를 옭아맬 것이다.


KakaoTalk_20251220_114726412.png Gemini 그림


‘그도 한 가정의 가장일 텐데,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주말의 출근길에 나섰을 텐데, 이런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을 꿈에도 몰랐을 텐데, 오늘 운수가 어찌 그리도 사나울까. 보는 사람도 눈과, 귀와, 벌렁대는 심장까지도 죄다 씻어내고 싶은데, 당사자는 오죽할까. 제발, 변호사가 필요한 지경까지 가지 않았으면, CCTV는 얼마나 그에게 도움이 될까......’

남성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쏟아부어야 할 노력과 시간과 논리적인 해명. 생각만 해도 골머리가

아팠다.

불과 몇 분 전,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 여성 부근에서 큰소리의 욕설을 들었던 터라, 그녀가 일부러 일을

만든 게 분명하다는 심증은 차츰 굳어만 갔다. 대체 왜, 왜 그랬을까. 그녀도 출근길인 모양인데,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벌인 것일까? 악마의 속삭임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온종일 아침 사건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생각은 비약에 비약을 거듭하여, 우리 사회가 정말 이대로 가도

좋은가, 로 시작하여 성선설 성악설을 떠올리고, 인드라망까지 음미하기에 이르렀다. 잊을 만하면 매스컴을

오르내리는 섬찟한 뉴스들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 아픈 사람들이 저지르는 범법 행위! 선량한 다수의 시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정작 위법을 저지른 그들은 심신 미약이라는 면죄부 뒤로 꽁꽁 숨어버리는

영악함까지 지녔다. 누구를 위한 법이고 누구를 위한 인권인지. 함무라비 시대는 어땠을까? 그 시대에도 후안무치한 범죄가 있었을까? 심신 미약이라는 면죄부만 들이대면 후안무치한 범법행위도 솜방망이 처벌로

마무리가 되었을까? '눈에는 눈' 등, 몇 개 조목만 보아도 형벌이 꽤 엄중했던 걸로 아는데, 형벌이 무거운

만큼 범죄가 좀 줄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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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우 : Gemini그림


사건의 추이가 몹시도 궁금했다. 남성의 억울함이 풀렸는지 알아야 했다. 퇴근길, 지하철 경찰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어, 역무실을 찾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출입문에 붙어 있는 전화번호로 연락을 시도해 보았다. 신호음이 한참 들리더니 이윽고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대략 사건을 설명했더니 혹시 본인이십니까, 묻는다.

‘에고, 선생님! 본인이라면 굳이 전화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건이 해결되었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궁금할 일은 없을 텐데요.’

하여튼, 아는 바도 없고, 보고 받은 것도 없다는 답변만 얻었다. 또 집에 와서는 오지랖 끝내 준다는 퉁셍이만

들었다.

남의 편이라 이해는 합니다만, 글쎄, 가련한 남성의 몸부림과 외침을, 넋 놓고 지켜보기만 했던 무기력한 방관자들(젊은 1인만 빼고) 속에 내가 끼어 있었다니까요! 부끄럽고 미안해서라도 사건의 결말이 살짝 궁금했을 뿐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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