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섬결 생각

섣달 그믐날의 파김치는 나야, 나!

by 나탈리


"맨날 배추김치만 먹나? 배추김치 말고 다른 김치도 달라, 파김치나 갓김치는 왜 안 담았는가?"

옆지기의 구성진 파김치 타령을 무시할 수 없어, 퇴근길에 쪽파 여섯 단을 사다가, 늦은 시각부터 손질을 시작했다. 갓은 때가 지나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하니 파김치로 만족하시라! 변명처럼 부연 설명을 하고는 양손에 비닐장갑을 야무지게 착용했다. 먼저 뿌리 부분을 싹둑싹둑 잘라낸 다음 시들어버린 겉잎을 다듬었다. TV를 보며 옆지기와 함께 손질을 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트롯 방송을 열혈시청 중인 옆지기의 파 다듬는 솜씨에는 신뢰가 안 갔다. 누런 잎도 괜찮다며 내버려 두고 쪽파를 다듬는 바람에, 김장할 때 손이 한 차례 더 갔던 것을 생각하면, 애초부터 혼자 하는 것이 속이 편할지도 몰랐다. 또 거실에서 다듬으면 매운내가 온 집안에 진동을 할 것이니 안방에서 하고 환기를 조금만 시키면 될 듯싶었다.


까도 까도 그대로인 쪽파무더기들! 다듬어 놓은 것을 살 걸 그랬나 일순 후회도 들었다. 비싸고, 단면 또한

변색되어 신선해 보이지 않음에 알뜰주부로서 그럴 수는 없다고, 시장을 돌고 돌아, 고른 쪽파였다. 낮은

기온 탓인지 껍질이 물컹거리는 파 껍질을, 유튜브 설교 말씀을 응원 삼아 마지막까지 다듬고 나니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갔다. 시작이 반이라 하였으니 이제 반 남았다. 아침나절에 얼른 해치우고 마음껏 휴식을

취해야지. 흐뭇함, 피로감, 그리고 매운내가 채 가시지 않은 공간 속에서의 꿀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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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자마자 밥부터 안치고 파김치 작전 2에 돌입했다. 먼저 파를 씻어야 하는데, 베란다에서 씻자니 추울 것 같고 싱크대에서 하자니 물이 튀어 너무 번잡스러울 것 같았다. 욕실에서 씻지 그래? 남편의 권유대로 욕실 바닥에 커다란 함지박을 놓고 물을 가득 받아 파를 씻기로 했다. 가지런히 놓인 쪽파를 한 움큼씩 집어 들고,

살랑살랑 목욕(?)을 시킨다. 흙먼지가 많았던지 물이 제법 지저분하다. 엉키면 큰일! 뭐니 뭐니 해도 파김치는 가지런함이 생명! 그러니 씻을 때나 버무릴 때나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어루만지듯, 아이 목욕시키듯

물세례를 주는 의식은, 자세도 그렇거니와 시간도 꽤 걸렸다. 쪼그려 앉은 자세가 너무도 불편하고 허리가

아프다.


”허리 아파 안 되겠어. 다시 싱크대로 고고!”

“당신 맘대로 하세요!”

일어나자마자 TV공부에 열심인 옆지기의 심드렁한 말투를 뒤로 하고, 욕실에서 한 차례, 싱크대로 옮겨

두어 차례 더 세척을 시킨 뽀얀 쪽파무더기들을 연한 소금물에 살짝 절였다. 그리고는 양념 준비. 멸치액젓, 새우젓, 매실 진액, 양파, 마늘, 찹쌀풀, 미원 한 꼬집, 통깨를 털어 넣고 휘리릭 혼합하여 맛을 본다. 파김치는

달보드레해야 제 맛이라 하시던 어머니 말씀대로 달짝지근하고 짭조름하도록 양념을 배합했다.


파가 부드러워지는 동안 청소나 간단히 해 볼까. 묵은 때를 씻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아야겠지?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욕실을 먼저 끝내고 청소기를 미는데, 어느새 소파 위로 올라앉은 옆지기, 청소기가 다가가니

두 발만 번쩍 든다. 연속극의 한 장면,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송구영신 작전에는

걸림돌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베란다, 뒷베란다, 현관, 온갖 먼지가 앉을 만한 곳들을 죄다 털고 닦아냈다. 새로운 공기로 집안이 일렁일 무렵, 달그락거리며 뭔가를 차려 내는 딸내미. 소파 앞 떠나기를 무서워하던

옆지기를 재촉하여 식탁에 주욱 둘러앉았다. 짭조름한 소금빵과 달콤한 도넛과 따뜻한 차와 함께하는 브런치 타임. 달콤한 것을 멀리해야 하는데...... 할 수 없다. 먹고 열심히 일할 거니깐......


KakaoTalk_20260118_174313287_04.jpg Gemini 그림



'파김치 작전 3'이 수행할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콤한 것들로 에너지를 충전한 김에 얼른, 빨리, 후다닥, 끝내버리자!'

쪽파를 조금씩 집어 들고 신부화장을 시키듯 골고루 양념을 발라준다. 연지 곤지 찍고 다소곳이 고개를

수그린 신부처럼 손 안의 파김치 한 움큼은 사랑스럽다. 반쯤 접어 끝부분을 두어 바퀴 돌려 김치통에

차곡차곡 담는다. 종아리가 뻐근해져 온다. 앉아서 하면 관절에 무리가 갈 것 같아, 식탁 앞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까닭이다.


"아직 멀었어?"

감독관의 질문이 왠지 유쾌하지가 않다.

"뭘 그리 오래 걸려? 파김치 그까짓 거, 다음부터 내가 할게. 알려만 줘."

대꾸할 여유조차 없다. 얼른 이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마음뿐. 드디어 수십 번의 '차곡차곡'도 끝이 보인다. 파김치 한 통을 완성하고 파김치가 된 듯한 이 기분. 아, 김치 담가주는 로봇이 있다면......

양념 냄새가 좋은데? 쪽파가 맵싸하니 좋군. 간결한 품평과 함께 TV 앞의 감독관은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 그러고는 앞으로도 파김치가 떨어지기 전에 꼭 미리미리 담그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파김치 한 통 완성, 대청소, 친구와의 저녁 약속까지 모두 마친 섣달 그믐날 밤. 거의 하루 종일 붙박이별처럼 기대어 있던 소파에 앉아 잠시 쉰다는 것이, 그만 코까지 골며 졸았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그랬다고 한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극구 부인을 하는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동영상을 보여주는 딸내미. 참말,

짓궂기도.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비음을 내뿜으며 졸고 있는 여인, 섣달 그믐날의 파김치는, 바로, 나였다! 강추위와 피로에 버무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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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고 있던 모습이 왼쪽(Gemini 작품)처럼 귀여웠음 싶은데 현실은 오른쪽(옷과 머플러 제미나이제공)에 가까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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