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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Oct 25. 2023

놀부가 기가 막혀!

설단의 벽 앞에서

흥부가  중, 화초장 타령을 보면 화초장을 얻어 등에 지고 가던 놀부가, 개울가를  건너다  화초장이라는 이름을 잊어버리고 한바탕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화초장 하나를 얻었네, 로 시작하여 장이 붙은 단어란 단어는 다 끌려 나오는데, 초장화, 화장초, 장초화, 장화초, 화화장, 초초장도 부족해 간장,  된장, 개장, 우장, 구들장, 고추장까지  나열하는 놀부를 보며 배꼽을 잡고 웃던 기억이 있으신지.


불현듯 화초장 타령의 놀부를 떠올리게 된 건 요즘 들어 설단(舌斷) 현상이 너무도 잦은 그이 때문이다. 대화를 하다 보면 도우미가 필요할 정도로 그는 이름이나 용어를 수월하게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게 뭐였더라? 거 있잖아. 그가 서두를 이렇게 떼며, 장황하게 설명을 하면, 나는 그의 혀 끝에 머물러 있는 단어를 꺼내주기 위해 분투를 해야 한다. 단어가 재빨리 나와 주면 대화는 물 흐르듯 이어지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의 부연설명이 또다시 시작되어 대화는 한없이 길어진다.


한두 번이라면 단순히 웃고 넘길 일이라지만 그게 일상적이니 심각하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다. 무엇이건 기억하려고 노력 좀 해 보라고 핀잔도 주고 메모를 해 보라 권유도 하지만, 그는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문제는 그런 현상이 더이상 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도 서서히 설단의 벽과 맞닥뜨리는 경우가 잦아짐에 따라, 틈만 나면 지인들에게 물어보는데 대체적으로 다들 사정이 비슷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건망증이 점점 심해지니 어떡하면 좋으냐고 서로 근심을 나누다가, 그럴 나이에 이르렀다는 결론에 안도하며 마음을 토닥거리는 수순으로 고민은 일단락 된다.


그렇다고 고민이 일거에 소멸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가 않는 것이, 복병처럼 암암리에 도사리고 있다가 빈틈을 공격해 오니, 속수무책일 밖에 없다. 편백 나무가 생각이 나지 않아 몇 시간을 끙끙대다 아이에게 물으니 금세 나온다. 그가 내게 묻듯 아이의 도움을 받아서야 기억해 내다니! 다음날, 또 편백이란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미칠 노릇이다. 또 묻는다. 이와 같은 경우가 많아지니 자신에게 짜증이 일며 치매 아닌가고 걱정이 늘어갈 수밖에..... 


숲이 그린 집. ebs 프로를 보고 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젊은 부부가 주인공인데, 수의사 부부가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귀농하여 닭과 거위를 기르며 아이들과 소박하게 사는 모습이 한 편의 동화 같다. 꾸밈없이 자연에 가깝게 지은 집에서, 전기도 자체적으로 생산하여 사용하고, 메탄가스를 만들어 취사와 난방을 하는, 오프그리드(off-grid)의 삶이 인상 깊게 다가다.


아이들은 맨발로 걸어 다니며 풀과의 감촉을 즐기고, 집 주위의 야행초는  신선한 즉석 식재료가 되어 준다. 쐐기풀 버거를 만들어 먹으며 가족들은 행복하게 미소짓고, 화분으로 뒤덮인 폐자동차는  모종을 품어키우는 미니 온실로 탈바꿈했다. 또한 그들은 폐타이어를 잘라 보도 블록을 대체하고 잡초를 베어 짚 대신 가축의 보금자리에 깔아준다. 자연은 필요한 것을 거의 모두 그들에게 베풀어주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일구는 그들의 삶에 결핍이란 결코 없어 보다. 뿐만 아니라 부부는 오프그리드(off-grid)의 삶을 지향하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들이 경험하고 터득한 삶의 노하우를 기꺼이 전하고 나눠 까지 하니, 진정한 자연인으로, 대자연 속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건강하게 사는 그들이 부러워, 눈을 떼지 못하고 하냥 바라만 봤다.


완전 자업자득이네? 그가 불쑥 한 마디 던졌다. 어라? 말이 저 상황에 맞는 말인가? 열심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중에도, 비슷하긴 하지만 그 말이 아니라는  확신. 그러니까, 그 비슷한 말이 도대체 뭐냐고, 얼른 생각 좀 해 보라고! 프로가 끝나도록 생각이 나지 않던  사자성어가 마침내 엔딩을 알리고 자막이 뜨자마자 떠오른다. '자급자족(自給自足)'

'자업자득'과 얼추 소리는 비슷하지만 의미는 전혀 다른 사자성어, 자급자족! 유치원생들도 알 만한 말을 이리 힘들게 꺼내야 하다니, 오 마이 갓!


'아까 그 말, 자업자득 말인데, 그 말은 그런 경우에 쓰는 게 아니어요.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여태껏 떠오르지 않아  머리를 열심히 굴렸거든. 자급자족이어야 맞아요. 자업자득은 자기가  잘못한 일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부정적인 경우에 쓰는 말이고, 자급자족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어 충당한다는 말이니까,  그 젊은 부부의 삶과  들어맞는 말이지요. 자기 말때문에 깜빡 속을 뻔했네. 지금까지 생각해 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그는 머쓱해하며 웃었다.

'당신 말도 맞지만 내 말도 맞아. 수의사로 잘 나가던 사람들이 시골로 갔으니, 자급자족의 삶이 그들에겐 자업자득이 된 거지.'

그는 꿋꿋이 자신의 의견을 설파하는 것이, 전혀 밀리고 싶지 않은 눈치다. 

'갖다 붙이기도 잘하십니다그려.'

'아니 그런데, 당신은 여태 그 말만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는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그럼, 생각을 해내야지, 머리가 녹슬어 가는데 그대로 놔두면 되겠냐며, 따라 웃다.


그러고 보니, 화장초, 장초화, 초초장, 화화장을 꺼내던 놀부도 우리 연배쯤 되었으려나? 지천명을 훌쩍 넘겼을까? 화초장 타령을 보아도 더 이상 웃어넘길 수 없는 우리 부부. 부부가 기가 막혀!

그래도 아직까지 그이 정도는 아니라 자부하였건만, 그나 나나 정도의 차이일 뿐, 이와 같은 상황에 자꾸만 노출이 되니 걱정스럽다. 그의 말머리를 꺼내줘야 하는데. 우리도 놀부처럼 기가 막힌 경우가 생기면 어찌 풀어야 기가 원활하게 순환할. AI에게 물어야 하나? 장황하게 검색을 해야 하나? 어쨌거나 설단의 벽을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의 노력을 다 해야 할 것 같다. 좌뇌를 자극할 만한 운동에 뭐가 있으려나, 기억의 수레바퀴를 잘 돌아가게 만들  수 있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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