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 여사의 외출, 묵은 숙제를 이제 꺼내어 봅니다
“우렁이 외출하면 비가 온다더니, 이번에도 예외가 없군 그래!”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시작될 기미가 보이므로 우렁 여사는 비를 몰고 다니는 능력자로 타박 아닌
타박을 받아야 했다. 진주 유등 축제에 가기로 했는데, 비가 오면 축제고 뭐고 다 취소될 게 아닌가. 당연히
일정도 바꿔야 할 것이고…… 애초에는 세 자매끼리 기차여행의 낭만을 맘껏 누리며 목포에 가 일박을
하자는 계획이었으나, 동생 내외의 권유로 유등 축제가 한창인 진주로 목적지가 바뀌었다. 제부가 운전기사를 자청하며 당일치기 진주 여행을 제안하는데 미안하고 고마워서 거절할 수도 없었다. 거절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두 형님(언니와 나)들은 못 이기는 척,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었다.
그런데 날씨가 이러니, 어쩌나. 어렵사리 결정한 사항을 번복해야 하나? 요란한 비 예보와 금세 비가
쏟아질 듯한 찌푸린 하늘. 고민은 깊어만 가는데,
“검색해 보니 진주에 도착할 무렵부터는 날이 갠다고 나오던데요, 그냥 가기로 하시지요?”
제일 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제부가 염려 삼매경에 빠진 자매들에게 조심스레 의견을 건넸다.
“운전사 맘대로 하셔야지요.”
기 기사님( 성이 ‘기’ 여서 기 기사님 )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착한 세 자매. 유등 축제를 못 보면
어떠랴. 이렇게 같이 모인 게 얼마만인데.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귀중하냐. 한 달 전부터 스케줄
조정하고 가장 알맞은 날이라고 택한 게 오늘이건만 하필 날씨가 도움을 안 준다.
“비 오는 날의 드라이브도 운치 있고 좋겠지요, 우리야 좋지만 기사 님이 힘들어서......”
제부는 한사코 자신은 전혀 힘들지 않다고 웃기만 했다.
잿빛 휘장이 얼굴을 가려도 산은 굽이굽이 전설이라도 숨긴 듯 요염하고 매혹적인 자태로 눈길을 잡아끌고, 추수가 끝난 논에 드문드문 놓인 사일리지는 외계인이 흘리고 간 간식처럼 생뚱맞다. 예전에는 탈곡을 마친 짚단을 논 한가운데 쌓아 두어, 개구쟁이들의 놀이터로 곧잘 애용되고는 했는데, 요즘에는 하얗거나 파란,
혹은 보랏빛의 사일리지만이 추수가 끝났음을 알려줄 뿐이다. 한적한 도로, 드문드문 오가는 차량, 갈대들의 다정스러운 손짓! 비가 흩뿌리는 날의 서정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드라이브임에, 세 자매의 행복에 겨운 수다는 멈출 줄을 몰랐으니, 기 기사님은 운전하랴 여인들의 수다를 소화해 내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을 듯......
정읍을 출발, 담양에 들러 동생네가 추천하는 승일식당의 떡갈비로 요기를 했는데 달짝지근한 떡갈비며
청포묵, 곤드레나물, 시어 꼬부라진 갓김치가 제법 맛깔스러웠다. 센트럴 시티에서 미니 붕어빵 몇 마리로
아침을 대신했기에 정식이나 마찬가지인 떡갈비가 유독 달게 느껴졌다.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기 기사님의 식곤증을 몰아내려 휴게소에 들러 커피를 공수하였다. 곡성, 순천, 광양을 스치듯 지나 남해를
향해 주욱 국도를 탔다. 바로 진주로 가도 되지만 기왕 길을 나선 김에 남해 풍광을 처형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제부의 배려였다.
“탤런트 박원숙 님이 살다가 떠났다는 남해 말이지? 어딜 가도 한적하니 좋겠지. 바다가 있고 산도 있고.
바다가 보이는 언덕길도 있을 것이고.”
남해의 장관을 기대하며 우렁 여사는 시라도 한 수 읊을 태세인데 얄궂은 날씨가 헤살을 놓는다. 담양을
벗어나고부터 빗발이 점차 굵어지더니 바람까지 가세하여 시야를 가리는 것이다. 제부의 운전 실력이야
익히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장대비에 바람까지 심청 궂게 불어대니, 슬며시 걱정이 파고드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제부의 차분한 운전 덕에 유동의 창살들을 가르고 무사히 남해에 도착했지만, 전망 좋은 곳도 포토존도 다
무용지물일 뿐이라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와서 비 때문에 차 안에만 있으면 안 되지. 우산 있으니까 바깥바람 좀 쐬자고!”
동생의 성화로 장우산에 의지하여 비바람 속으로 나섰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다락논에 누런 벼 이삭들이 머리를 맞대고 뭐라 뭐라 웅성거리고들 있는 듯한 모습!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도 같은 게 왠지 처연하다.
그러나 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겨우 5분 정도 서 있었을 뿐인데, 우리의 어깨는 온통 젖어들고 언니가 든 장우산은 뒤집혀 앙상한 뼈대를 드러내버렸다.
다락논 풍경이며 바다 감상은 한 물 건너가고, 일단 차 안으로 피신!
“어르신 감기 걸리면 큰일인데? 얼른 옷부터 말려, 언니.”
동생이 도어 버튼을 누르자 바람이 나와 젖은 옷을 시나브로 말려 준다.
“경치 감상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유리창 너머로나 감상하며 진주로 가야 쓰겠네.”
“그래도 좋구나.”
“저기 한 귀퉁이가 환하게 밝아 오는 곳으로 가 볼게요. 그곳은 비가 내리지 않을 것도 같은데…..”
희붐한 하늘을 향해 제부는 액셀을 밟았고, 이윽고 도착한 곳은 삼천포였으나, 역시 비 때문에 주마간산 식으로 지나야 했다.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그곳이 바로 여기란 말이야? 그런데 왜 그 속담이 나왔을꼬?
진주로 가려다 어쩌다 잘못 도착한 곳이란 뜻 아닐까? 삼천포 다음은 사천? 사천은 포가 아니네? 시답잖은
얘기들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덧 사천. 때마침 빗줄기가 한결 순해진 틈을 타 수산시장에 둘러보았다.
문을 연 곳이 거의 없어 겨우 찾은 사천 수산 시장의 한 점포. 비릿한 바다 내음이 손님을 맞아준다. 죽방멸치는 단가가 워낙 높아 밀쳐 두고, 고추장 양념 뱅어포와 말린 감태를 몇 봉지씩 샀다.
“막둥이 것도 사야지?”
“아 참! 찬조까지 했는데, 사야지, 그럼!”
“이제 정말, 진주로 갑니다!”
제부는 유순해진 빗발 속으로 차분하게 우리를 인도해 갔고, 진주에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날씨가 갰다.
땅은 좀 젖었지만 축제 관람에는 가히 지장이 없어 보였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래도 바람은 호락호락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아 초겨울에나 느낄 법한 한기가 파고들었다. ‘개와 늑대의 시간’ 즈음. 어둠은
발 빠르게 포위망을 좁혀 오고, 그럴수록 유등은 눈을 반짝이며 관람객들을 동화 속으로 홀리기 시작한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