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愛)를 쓰다 (1)

1화. 저한테 알바 하세요.

by 기뮤

프롤로그

*

하영이 처음 글을 배울 때는 모든 글자에 꾸욱 힘을 주고 눌러 글자를 완성했다. 글을 배운 뒤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늘 연필을 잡을 때는 온 몸에 힘을 주었고, 그렇게 반듯한 글자를 온 몸으로 만들어 냈다. 그렇게 힘이라도 주면 그 글자들을 모두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1화. 저한테 알바 하세요.


하영은 틈만 나면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생각했다.

분명 저번에 결론을 냈던 고민인데 오늘 또 이렇게 고민하고 있다.


띠링.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딸, 왜 전화를 안 받아.'

지금 시각은 저녁 9시, 방금 온 연락에 답장은 하지 않고 하영은 느릿 느릿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엇을 해야 하지. 멍-한 정신으로 두리번 거리다가 이내 움직임을 다시 멈췄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벌떡 일어나 후드집업을 입었다. 나흘 내내 씻지 않은 머리는 모자로 감춘 채 문을 열었다.

가을의 차가운 바람이 하영을 감싼다. 원룸 앞에는 어떻게 피었는지 모를, 보라빛 백리향이 한 웅큼 피어있다.

하영은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발걸음은 바닷가 앞의 편의점에 도착했다. 하영이 저번 학기에 4달간 일했던 편의점이다.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 여기는 조금만 나가면 바다가 있어서 좋다고, 그랬었는데 그렇게 바다를 못 보러 온 지 3달이나 흘렀다.


편의점 내부엔 손님이 없어 알바생이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다. 하영과 같이 일했던 사람이다. 하영의 움직임은 멈췄고, 이내 견딜 수 없다는 듯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곧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고르고, 그의 앞에 두었다.

삑. 천팔백원입니다.

알바생은 느릿하게 일어나서 바코드 스캐너를 들더니 말했다.

하영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 고개를 숙이면 자신을 못 알아보는 줄 아는 어린 아이처럼.

어? 하영님. 오랜만이네요.

... 오랜만이에요.

요즘 통 안 보이시더니. 아 맞다, 저 이제 알바 잘려요. 사장님 좀 이상한 거 같아요, 진짜.. 다 참고 일하려고 했더니 하.

알바생은 중얼거렸고, 하영은 '네,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요.' 하고 나가려고 했다.

아, 이거 1+1이에요. 음료수 하나 더 꺼내오세요.

하영은 불행 속 자신을 조소하며 음료수 하나를 더 꺼내 왔다.

근데 이 밤에 어디 가시려고요?

갈 때가 있어서요.


계산을 급하게 하고 편의점을 나온 하영은 바닷가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후...

가만히, 가만히- 밤바다를 바라보며 바람을 느꼈다.

여러 생각들이 스쳐야 할 것 같았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바다 앞에 앉아서 하영은 생각했다.

죽을까. 망가진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고 밤바람이 추워 벌벌 떨도록,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처럼 하영은 가만히 앉아 있다. 눈은 반쯤 풀려 있었지만 기어코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아니, 아직도 안 들어가셨어요?

옆에서 말을 걸어와 보니 아까 그 알바생 남자였다.

네, 어쩌다보니.

하영이 핸드폰을 보니 벌써 11시 28분이 되어 있었다.

빨리 들어가는 게 좋을 걸요. 여기 주변에 살인사건이 한 번 난 적 있다 그러더라고요.

하영에겐 왜인지 모르게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번졌다.

...... 본인이나 먼저 들어가세요.

자신도 모르게 욱해서 일생동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뱉어 버렸다.

네?

본인이나 먼저 들어가시라고요...

하영에게 이제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고, 자꾸만 어디를 향할지 모르는 감정만 새어나왔다.

아.

알바생은 의외라는 듯 하영을 잠시 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리고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러시던지요, 그럼. 사람이 걱정돼서 말해줬더니.


그는 하영을 등지고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나 왜인지 다시 멈춰 서서 하영과 같은 곳을 바라본다. 바다를.

그렇게 십분쯤 흘렀을까.


하영이 또 망연한 표정으로 3발자국 거리를 둔 알바생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시선은 고정한 채로.

알바가 고민이에요? 기태님 알바하실래요, 그럼.

하영은 언뜻 들은 이야기로 기태의 속사정을 알고 있었다. 알바를 해서 생활비를 버는 기태는 벼락 맞은 것처럼 잘린 알바 때문에 마음이 심란할 것이었다.

갑자기 무슨 알바요?

하영의 속을 도통 알 없는 기태는 여전히 퉁명스럽게 물었다. 하영의 대답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저한테요. 일종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이 사람이 정말 돌았나, 기태는 잠시 생각하며 하영을 봤다. 같이 알바할 때도 제정신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 터였다.

음, 원래 알바하던 시간이 좋겠네요, 월, 수 5시부터 10시. 기간은...딱 2달. 제 푸념을 들어주세요. 그리고 제가 무슨 말을 하면 대답은 늘 듣기 좋은 말로 받아줘야 해요. 칭찬도 많이 해주고.. 챗지피티한테 상담받는 것처럼. 딱 5시간동안 그렇게 해주면 돼요.

갑자기 사람 붙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그렇게 위로 받고 싶은 거면 챗지피티한테 하면 되잖아요. 다른 친구한테 받거나.

챗지피티랑 사람이랑은 다르죠. 그리고... 그럴 만한 친구가 없어요.

이런 알바를 구하는 의도가 뭐죠? 그리고 대체 왜 제가?

... 이제 더는 말로 상처받는 삶은 싫어요. 좋은 것만 들을 거에요, 딱 두달동안은. 딱 2달 동안은, 누구보다 기 펴고 살 거에요.

허, 기태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 할 거면 하지 말아요. 다른 사람 찾을 거에요.

아니 누가 또 안 한대요? 때마침 알바 찾아야 하는데 시간대 맞는 알바 찾기도 힘들고.. 할게요. 근데 원래 단기알바는 시급 더 많이 쳐줘야 하는데...

그제서야 하영은 기태를 흘깃하며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래요, 좋아요. 그닥 좋진 않지만 제가 좀 돈이 급해서.

하영이 한 숨을 쉬었다.

내일 이 시간, 여기로 계약서 가져올게요.

하영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며 말했다.

그럼 내일 여기서 만나는 거에요. 그리고 근무는 내일부터. 내일 만나면 제가 고용자인 거 잊지 말아요.

남겨진 기태는 뭐 저런 사람이 있나, 하영의 뒷모습을 한참을 보고 서있었다.




2달이 끝나면 하영은 죽겠다고 다짐했다. 죽기 전 2달은 살면서 저축해둔 돈을 몽땅 쓰고 죽을 작정이었다. 이왕이면 기부하는 마음으로.

하영은 스스로 자문했다. 나는 왜 마지막 순간에 기태를 선택했나.

하영은 알바할 때도 기태와 있을 때는 마음이 편했다. 남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고, 말을 곱게 포장해본 적도 없어보이는 사람. 처음에는 그런 기태가 거슬리기도 했지만 나도 내 안에 가끔씩 세워지는 날을 애써 포장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편했다.

서툴고 투박한 말로 곁에 있는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것이, 재봉틀에 실이 삐뚤게 꾀매어져 나오는 그것이. 상처받으면서도 웃음이 새어나올 때가 있었다. 그래서 생애 마지막 순간에 궁금했나 보다. 저 사람과 함께하면 난 변할 수 있을까. 저런 서툰 사람에게 잘 갖춰진 말을 어떻게 나오려나.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런 정신나간 제안도 하지 못했을 거다.


하영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 전 자신의 인생에 하나의 수를 두었다.

죽기 전에야 낼 수 있었던 용기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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