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와야 오는 거지

뉴델리 기차역에서 배운 India time

by 체리색크레파스

연봉 1억, 외국계 금융 애널리스트에서 인도행 비행기를 탄 지 하루째였다.


까마득한 밤 12시, 뉴델리에 도착했다. 도착 전 가장 크게 걱정했던 심카드 문제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해결됐다.예전 인도 여행에서는 암리차르에 도착하는 바람에 심카드를 사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었다. 그런데 수도는 달랐다. 공항에서 바로, 너무 쉽게 끝났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괜히 이번 여행은 잘 풀릴 것 같았다. 공항을 나서자 공기가 확 다르게 느껴졌다. 벽에 스며든 것만 같은 강력한 시큼하면서도 달짝한 향신료 냄새. 터번을 쓴 사람들, 긴 수염, 낯선 언어들로 적혀 있는 표지들. 아, 내가 인도에 "또" 왔다.


보통의 인도 여행자들은, 일단 인도에 오기로 마음먹었다면 "매우"조심히 행동하고 이동한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4성급 호텔 도착 패키지를 이용해 도착하자마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호텔전용 기사의 라이딩을 받아 호텔로 이동했고, 그다음 날도 호텔에서 전용 기사의 도움을 받아 관광지를 구경했다. 그 길은 안전하고 편안하다. 낯선 여행지에서 초반에는 마음이 편해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 긴장이 풀리면 모험심이 올라온다. 오토바이를 빌려 낯선도시를 GPS에 의존해 낯선도시를 탐험한다. 이미 그 전해에 두 달간 인도, 네팔 여행을 다녀왔었기에 두 번째인 이번엔 가능한 자립하고 싶었다.


내가 오늘 탑승할 리시케시행 Yoga Express열차는 뉴델리 기준 서남부 구자라트에서 동북쪽 리시케시까지 장장 24시간 동안 45개 역을 지나며 1200km를 달리는 기차다. 기차에 타면 비행기에서보다 다양한 현지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타 지역에서 공부하는 대학생, 고향에 돌아가는 가족, 출장 나온 회사원. 낮에는 앉아 가고 밤에는 칸칸이 침대에서 자는데 그 옹기종기한 경험을 좋아한다. 나게 여행은 그저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뿐만 아니라 낯선 환경에서 터지는 긴박한 상황을 내 스스로 대처해 가며 성장하는 모험이다. 정신만 바짝 차리면 나 혼자 세계 어디에서도 지낼 수 있다는 자율감과 통제력의 감각이 좋아 나는 여행이 아닌 모험을 한다.


이제 나는 공항과 가장 가까운 기차역 플랫폼에 서 있다. 바닥에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기다리는 건지, 자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전 인도여행에서 새벽 5시 열차를 타러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던 사람들을 보고 무서워 울음이 터졌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기차가 오자 아무 일 없다는 듯 이불을 개어 들고 탔다.


이번엔 다르다.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화려하고 휘양찰란한공항근처 비즈니스맨, 관광객들을 위한 에어로시티를 지나 도심속 낡은 기차역에 서서야, 비로소 진짜 인도에 발을 디딘 기분이 든다.

20kg 배낭 하나 멘 나의 오늘의 퀘스트는 단순하다. 기차를 타고, 리시케시에 도착하는 것.


공항 도착 12시, 새벽 1시 반 기차역 도착. 두어 시가 되기까지는 모든 것이 다 괜찮았다.

눈을 좀 붙이고 싶었지만 새로운 나라에 도착한 도파민, 설렘 그리고 두려움 덕에 잠은 기차에 타고 자도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인적이 드문 인도역에서 외국인 여성 혼자 자는 것은 위험하다는 감각은 있다. 이미 여성 혼자, 비인도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시선이 쏠린다. 괜히 그 이상의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외국, 밤, 혼자, 여자. 나는 이곳에서 약자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분명 플랫폼 위에는 지붕이 있었는데도 나는 순식간에 생쥐처럼 흠뻑 젖어버렸다. 마른하늘에 내리친 날벼락이 바로 이날 밤을 설명하는 단어일 것이다. 폭풍과 번개, 마치 소방호스로 쏘아대는 듯한 비바람에 사람들 모두 생쥐 꼴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뭐 괜찮다 잠시기다리면 기차가 올 테니까.


2시 반, 3시, 4시. 기차는 오지 않았다. 아 나는 한 번도 인도에서 지연을 맞이한 적이 없었는데

5시 한 시간 정도야. 그럴 수 있지. 폭풍우 덕에 정말 많이 지연되나 보다

6시 혹시 기차가 취소된 건 아닐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한마디의 방송이 없지?

7시 이제 작디작은 역무실을 제외하고는 플랫폼 가득 물이 가득 찼다. 나는 외국인이라는 특혜로 역무실에서 조금 기다린다. 그나마 문이 있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

8시 한두 정류장 역 전에 있으니 플랫폼에 가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다. 기차가 오는 것을 놓치면 낭패다.

8시가 되자 플랫폼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기다리던 인도 가족이 있었다. 남자들로 가득한 플랫폼에서 내가 심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현지인그룹이었다. 여자 혼자 여행할 때 철직. 아이, 가족, 여자가 있는 현지인무리 근처에 서성일 것. 북쪽으로 가족여행을 간다며 신나게 사진을 찍던 가족이었다. 딸이 영어를 조금 해서 기차가 왜 이리 안 오냐고 몇 마디 주고받았었다. 그러나 퍼붓는 비와 바람. 엄마가 비를 너무 맞아 몸이 안 좋아졌다며 결국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나도 어디 돌아갈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이 도시에 방금 떨어졌다. 내가 아는 갈 수 있는 곳은 제한적이다. 너무 추워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막연하게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이었다면 안내 방송이 나왔을 것이다. “이 열차는 연착되었습니다.” 아니면 시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인도는 달랐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들의 태도와 행동에서 배웠다


기차가 와야 오는 거지.


비태풍 속 기차를 기다린 지 6시간 반, 새벽 4시 예정 기차는 아침 9시가 넘어서서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까지 플랫폼에 남아 있던 사람은 20명도 안 되는 것 같았다. 돌아갈 곳이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포기하고 돌아갔는데 끝까지 이 기차를 기다린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나처럼 갈곳이 없거나 꼭 북쪽으로 이동해야 할 각각의 사정이 있는 거겠지. 기차가 오는 모습을 보니 그저 몸을 피할곳이 생겼음에 그리고 기차가 취소된것이 아니였음에 감사하다. 감사하다. 공기가 있어서 감사하다. 살아있어서 감사하다.


기차에 올라탔다. 비를 잔뜩 맞은 외국인이 올라타자 기차 안 사람들이 전부 나를 쳐다봤다. 이 비바람에 외국인은 무엇? 아니 그런데 이 사람 괜찮냐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세상에. 나는 기차표를 예매했다고 생각했는데 표가 컨펌이 안 된 상태였다. Not yet confirmed이라는 단어가 나는 열차도착이 확인이 안 되었다는 건 줄 알았는데 티켓 자체가 컨펌이 안된 거였다!!!. 나는 정말 쓰러질 것 같았다. 없는 기차표를 가지고 6시간을 폭풍우를 절실히 기다린 것이다. 폭우 속이라 기차가 텅텅 비어있었줄 알았는데 웬걸? 기차는 만석이었다! 그럼 뭐 어떻게 하라고. 내리라고? 어딜? 나 어떻게 하지?


폭풍우 속 올라탄 외국인이 쓰러질 듯 바로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말했다. “검표원한테 가서 사정을 이야기해 보세요.” 나는 검표원을 찾아가 사정했다. “저 밤 12시에 당신의 나라 인도 뉴델리 도착해서 지금 리시케시 가는 기차 탔어요. 비 맞으면서 6시간 기다렸어요. 이 열 차가 아니면 갈 곳도 없어요. 제발 딱한 사정 좀 봐주세요”


자신들의 나라에 온 지 10시간도 안 된, 완전히 초라한 외국인의 처지가 안쓰러웠을 것이다.

검표원은 잠시 내 젖은 몸과 떨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짧지만 분명한 동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좌석 체크를 하더나 조용히 한 윗 침대를 가리켰다. “여기 앉으세요.”


이빨과 손 그리고 마음까지 덜덜 떨어가며 2층 침대석으로 올라갔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누군가 차이 티를 가져다주었다. 작은 컵에 담긴 따끈한 차이가 손끝까지 온기를 전해왔다. 또 다른 승객은 내게 담요를 건넸다. 그렇게 전해받은 담요는 한 장, 두 장, 세 장… 어느새 네 장이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비와 추위로 얼었던 몸과 마음이 조금씩 녹아갔다. 여기도 사람사는곳이구나. 고맙다. 참 고..맙.... zzzZZ


한숨 푹 자고, 화장실을 가려고 2층 침대에서 내려가자 주변 사람들이 부드럽게 물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차이 한 잔 더 할래요?”

현지인들의 관심과 친절함은 이 폭풍우 같은 하루에 무지개가 되어주었다.
낯선 나라, 낯선 공간이었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조금 정신차린 나는 기차 탑승객들과 수다를 이어갔다. 이렇게 기차가 늦게 지연됬는데 화나지 않느냐고. 기차가 와야 오는거지! 허허 와준것에 감사하다네. 그렇지. 나도기차에 올라탈때 그렇게 느꼈다. 결국 와주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나를 버리지 않아줘서 고맙다고.


원래 오전 10시 도착 예정이던 기차는 오후 6시에 리시케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며칠 동안 몸살감기를 앓았다. 그렇게 인도에서의 폭풍 같은 하루가 지나갔다. 당연하게 여기던것이 더이상 당연하지 않다는것을 온몸으로 느낀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인도의 시간, India Time을 배웠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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