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rnando from Canary Islands
스틱 중 하나가 망가져 버렸다. 사리아에서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했으나 포기하고 남은 하나만 들고 가기로 했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스틱 두 개로 걸어왔는데 갑자기 하나로 줄어버린 스틱에 적응하려니 낯설었다. 하나 남은 스틱이 꼭 아빠가 떠나고 혼자 남은 엄마처럼 느껴져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포르토마린Portomarín을 지나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 알베르게까지. 이곳에서 ‘까나리아 제도’라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곳에서 오신 아저씨를 만났다. 까나리아는 아프리카 모로코 근처에 있는 휴양지로 유명한 섬이었다. 스페인령이라 아저씨 역시 스페인어만 줄기차게 하셨지만 며칠간 알베르게에서 함께 묵고 밥도 해 먹으며 친해졌다. 이 아저씨가 바로 나에게 찾아온 열 번째 기적, 페르난도이다.
순례자 사이에서 언니와 나는 늘 꼴찌 출발 담당이었다. 그런 우리보다 더 느긋한 아저씨 덕에 처음으로 꼴찌를 면했다. 하지만 이 아저씨가 이렇게 아침마다 느긋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축지법이었다. ‘말로만 듣던 축지법을 내가 이렇게 산티아고에서 보는구나.’ 싶을 정도로 아저씨의 걷는 속도는 경이로웠다.
한순간 눈앞에서 사라진 아저씨와 우연히 다시 만난 곳은 문어 요리로 유명한 멜리데Melide의 한 식당이었다. 동네 사람들이란 사람들은 다 모인 것 같은 핫플레이스에서 우리는 셋이 뽈뽀를 먹으며 한잔했다. 문어를 통으로 삶고 건져서 올리브오일 쓱 뿌리고 고춧가루 같은 양념 살짝 친 게 전부인 이 요리. 재료가 워낙 신선해서일까. 그 후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며 유명하다는 음식 다 먹어봤지만 멜리데의 뽈뽀 요리는 변함없이 내 원픽이다. (아르헨티나 스테이크가 2위!)
이런 최상의 안주를 두고 와인을 적당히 한 병만 (한 잔 아니고?!) 마시고 일어나 갈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 서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지금껏 만나지 못했던 폭우가 쏟아졌다.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근처 숲길에서 언니랑 나란히 앉아 노상방뇨를 했다. 폭우 속에서 행여나 우비에 묻을까 걱정하며 조심스레 쉬야를 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인생은 예상하지 못한 일의 연속이고 그래서 또 살아볼 가치가 있다.
취중 순례를 이어가다 보니 저 멀리서 페르난도 아저씨가 웬 못 보던 스틱을 하나 가지고 우릴 향해 다가오셨다. 축지법으로 먼저 가시다가 버려진 스틱 하나를 보시고 내 생각이 나서 가던 길을 무려 되돌아서 오신 것이다. 순례길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힘들게 앞으로 나아간 그 길에서 감히 뒤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고맙다는 인사를 할 새도 없이 아저씨는 또 축지법으로 저 멀리 사라지셨다.
아저씨 덕분에 다시 스틱 두 개로 리바디소Ribadiso에 도착했다. 역시나 먼저 도착해서 쉬고 계신 아저씨와 함께 근처 바르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오래간만에 취하고 싶다는 언니와 아저씨가 병맥을 드링킹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이야기도 무르익었다. 알고 보니 아저씨도 내가 메세타 조난 사고를 당한 그 구간에서 안개 때문에 길을 잃었다고 하셨다. 아저씨가 택한 방법은? 바로 그냥 밤새 동틀 때까지 걷는 것! 무려 7-80km를 걸으셨다고 했다. 휴우…. 역시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들만큼 훌륭하신 분들이 그렇게 흔하지 않지.
어쨌든 아저씨와 같은 고생을 나누었다는 것만으로도 진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의 인연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또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바로 철 십자가에서 내가 아빠 사진과 편지를 내려놓던 순간 그곳을 휙휙 지나가신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 아저씨가 바로 이 페르난도 아저씨였던 것이다! 아저씨는 그때 나를 처음 보셨다고 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내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가던 길을 되돌아와 최대한 방해되지 않게 멀리서 사진을 찍고 다시 가셨다는 것이다.
사실 철 십자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것은 좋았지만 찍어줄 사람이 없어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쉬웠던 터였다. 그 후 나는 아저씨의 존재조차 모르는 채로 한참을 걸었는데, 이제 와 이렇게 아저씨 휴대폰에서 철 십자가와 함께 있는 나를 보게 되다니. 벅찬 마음으로 선물 같은 그 사진을 한참 보고 있자니 갑자기 나도 잊고 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날 철 십자가를 지나 혼자 숲길을 걸을 때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럴 리 없지만 저 길 끝에 아빠가 딱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 저 모퉁이를 돌면 아빠가 계시지 않을까? 우리 딸 걷느라 고생한다고, 여기 와서 잠시 앉으라고 저기서 웃고 있을 것만 같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던 그때 정말 신기하게도 모퉁이를 도니 웬 아저씨 한 분이 의자에서 쉬고 계셨다. 그럼 혹시 그때 그 아저씨도 페르난도 아저씨였던 걸까? 얼굴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혹시 그 의자에서 쉬고 계시지 않았냐고 물으니 역시 맞다고 하셨다.
게다가 내가 꼭 아빠를 잃어버린 것처럼 느꼈던 스틱. 그래서 남은 스틱 한쪽으로만 걸었던 며칠. 그런데 바로 이 아저씨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 스틱을 가져다주셨다고 생각하니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까지 나왔다. 물론 우연의 일치이고 내가 의미를 부여 한 것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그 순간이 꼭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아저씨가 알아듣든 말든 아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얼마만큼 알아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런 것들은 다 상관 없다는 듯이 그저 웃으며 나를 안아주셨다. 그 품에서 나는 오랜만에 아빠 품에 안긴 듯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철 십자가가 나에게 전해줬던 작은 위로는 그렇게 페르난도 아저씨를 만나 완벽한 위로로 완성되었다.
결국 길 위에서도, 인생에서도 내가 찾은 해답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