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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정 Sep 15. 2023

산티아고, 사랑해! 고마워!

  어젯밤 과음한 언니와 페르난도 아저씨가 일어나기도 전에 나 혼자 부스럭부스럭 짐을 챙겨 나섰다. 발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진 언니는 택시를 타고 아저씨야 축지법을 쓰시지만 나는 혼자 40km를 걸어야 하는 날이기에 서둘러야 했다.  

   

  경보 수준으로 걸어서 금세 첫 번째 마을, 아르수아Arzúa에 도착했다. 초입에 있는 바르에서 카페콘레체와 토스트로 후다닥 아침을 먹었다. 주스도 한 잔 시키고 싶었으나 슈퍼마켓에서 더 저렴하게 파니 안 먹고 독하게 참았다. 곧 나타난 슈퍼마켓! (까미노에서 유서 깊은 성당보다, 수도원보다, 화살표보다 반가운 녀석) 그런데 주스를 다 세 개들이로 묶어 파는 것이 아닌가. 값은 싸지만 무거워서 사지 못하는 이 절절한 심정을 누가 알리오! 통탄하며 씁쓸하게 빈손으로 슈퍼마켓을 나섰다.  

   

  다시 속도를 내서 걸으니 산티아고까지 남은 km를 표시한 비석의 숫자가 정말 빠르게 줄어들었다. 산티아고까지 이제 30km, 29km, 28km. 그런데 줄어드는 숫자가 이상하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더 이상 이 숫자가 줄지 않았으면, 그렇게 산티아고에 영영 도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순례길 초반 한 시간에 한 번씩 주저앉아 등산화며 양말이며 다 벗어젖히고 쉬던 나, 22km를 걷고 알베르게 앞에 대자로 뻗어버린 나는 어디로 갔을까? 어느새 나는 쉼 없이 10km를 걷고 등산화 한번 벗지 않은 채 30km를 주파하는 워커홀릭(Walkerholic)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역시 막판 10km는 죽을 맛이었다.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 들며 초반처럼 속도도 낼 수 없었다.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으로 어느 마을의 평범한 집 앞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집 대문이 열리면서 할아버지가 나오시더니 내 손에 무언가를 턱 쥐여주시는 게 아닌가? 그것은 바로 순례길의 상징인 가리비로 만든 목걸이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상황에 얼떨떨하기만 했다.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할아버지는 별말씀도 없이 하던 일을 하러 무심하게 들어가셨다. 아마도 마당에 계실 때 순례자들이 지나가면 이렇게 미리 사두신 가리비 목걸이를 주시는 모양이었다. 즉 이 목걸이는 할아버지와 운 좋게 타이밍이 맞아야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었다.      


  지금까지 이 길을 걷는 내내 그랬다. 이보다 더 절묘할 수는 없는 타이밍에 늘 내 눈앞에 천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가 ‘레디~ 액션!’ 신호라도 준 것처럼 순례길이라는 무대 위에 차례로 등장했다. 그런데 마지막 날까지 내가 딱 주저앉고 싶은 이 타이밍에 또 어김없이 할아버지가 나타나 나를 일으키고 있었다.     


  사실 순례자들의 배낭에 매달린 가리비를 볼 때마다 늘 부러웠다. 걷다가 작은 기념품 가게가 보이면 들어가서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쩐지 배낭에 달 만한 가리비는 구하기 어려웠고, 나중에는 양말 하나도 무겁게 느껴지는 판에 그것도 다 짐이다 싶어 마음을 접고 걸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 나에게 쥐여주고 가신 가리비 목걸이를 목에 거는 순간 세상 어느 메달보다 값진 상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어떤 순간보다 간절하게 아빠 생각이 났다. 나의 간절함이 전해졌는지 이내 아빠가 옆에서 속삭이듯 답해주었다. 생전의 그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한 목소리로.    

 

  “우리 딸 장하다. 이 가리비 가지고 싶었지? 아빠가 직접 줄 수는 없으니 대신 아빠 친구를 보낼게.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수고 많았다.”     


  이제야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정말로 나 혼자 걸은 게 아니었구나. 옆에서 아빠가 함께 걸었구나. 올라코가 물병을 전해 준 첫날부터 할아버지가 목걸이를 전해 준 마지막 날까지. 아빠는 단 한 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구나.’     

 

  그런 확신이 들자 철 십자가 앞에서도 나지 않던 눈물이 그만 한순간에 터져버렸다. 그것은 슬픔과 그리움의 눈물이 아니었다. 차라리 기쁨과 안도의 눈물이었다. 그 뜨거운 눈물이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부터 북받쳐 오르며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얼마나 울며 걸었을까. 마음이 그렇게 시원하고 개운할 수가 없었다. 그 힘으로 마지막 몇 km를 더 걷고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님을 느낄 때쯤 드디어 마지막 마을, 몬테 델 고소Monte del Gozo에 도착했다.      

  가이드 책에서 이틀간에 걸쳐 걸으라고 추천한 코스를 아침 8시 30분부터 거의 쉬지 않고 꼬박 걸어 정확히 10시간만인 저녁 6시 30분에 도착한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40km를 걸어보니 마라토너들은 인간계가 아니라 신계에 있는 자들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렇게 열심히 쉬지 않고 걸어도 꼬박 10시간이 걸리는데 그들은 2시간 만에 이 거리를 주파한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순례길이 내게 남긴 최대의 미스터리였다.     


  퉁퉁 부은 눈으로 알베르게에 들어가니 안도감에 다리가 풀렸다. 곧 반가운 얼굴들이 나를 맞아주었다. 그중 베네수엘라에서 온 에르네스도 아저씨는 직접 내 등산화를 벗겨주고 실내화로 갈아 신겨주더니 흙 묻은 등산화 정리까지 해주었다. 며칠 전 폰세바돈에서 처음 본 아줌마와도 신나게 라틴댄스를 추는 스텝이 예사롭지 않아 전형적인 남미 끼쟁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자상한 면도 있었다.      


  지긋지긋한 배낭 정리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지금까지 나와 함께한 물건들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고 애틋하게 보였다. 첫날 무거운 짐 때문에 고생을 하고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미련도 없이 버린 것이 린스, 바디워시, 바디로션 삼총사였다. 이틀째부터 샴푸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부터 최대한 줄이고 챙겨온 짐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그까짓 것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었다.      


  그 후로도 틈만 나면 짐을 정리해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은 과감히 버렸다. 그렇게 줄이고 줄인 끝에 최종적으로 남은 짐들을 보니 정말 별것 없었다. 휴대폰, 카메라, 충전기, 침낭, 세면도구, 속옷, 일기장 정도. 이 정도만 가지고도 사람이 사는 데 큰 지장이 없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소비하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걷는다면 이보다도 짐을 더 줄여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어깨에 멘 짐이 가벼워야 발걸음도 가볍고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에도 눈길을 줄 여유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도 마찬가지. 필요 이상으로 가지려고 한 것, 필요도 없는데 버리지 못한 것. 그런 것들이 결국 내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되어 내 인생을 고단하게 할 뿐이다. 인생을 에베레스트 등반이 아닌 즐거운 소풍 길로 만들고 싶으면 내 어깨의 짐도 소풍날 가방처럼 가볍게 꾸리면 될 일이다.    


  이곳 역시 시설은 최신식이었지만 주방의 식기는 열악했다. 하지만 냄비 위에 컵을 올려 압력을 조절하는 경지에 이른 언니가 해주는 밥은 언제나처럼 맛있었다. 요플레 통을 수저 삼아 국물을 떠먹어도 행복했다. 이렇게 먹는 밥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었다.      


  언니는 어떻게 나 혼자 하루 만에 그 거리를 걸어 여기까지 왔냐며 대박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나를 진정한 페레그리뇨(순례자)로 인정한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제 하산을 해도 되겠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하산해도 되는 것일까? 산티아고에 도착해도 되는 것일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복잡 미묘한 심경으로 함께 산티아고로 향했다. 이제 정말 산티아고가 코앞이었다. 시골길만 내내 걷다가 갑자기 대도시로 진입하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바르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때깔부터 달라 보였다. 쿰쿰한 냄새가 밴 등산복과 등산화 차림을 한 내가 영 이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갑자기 다시 시골길로, 동네 할아버지들 가득한 정겨운 바르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순례길에서 되돌아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축지법을 쓰는 페르난도 아저씨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더 걸으니 우리 앞에 정말로 정말로 산티아고 대성당이 나타나 버렸다. 이 성당을 마주한 순간을 수없이 상상하며 걸었는데 드디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성당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고 그 앞에 마주 선 나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장해 있었다.     


  근처 사무실에서 순례자 증명서를 발급받고 미사에도 참석했다. 역사적인 성당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 친구들과 드리는 미사라 그 어느 미사보다 특별했다. 기쁜 마음도, 감격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무엇보다 감사의 마음이 가장 먼저 차올랐다. 현실이라는 벽 앞에 누군가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고, 누군가는 그저 꿈으로 남겨두었을 일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나의 의지로 해낸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이 가능하도록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움직여주지 않았다면 도대체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 이 길에 설 수나 있었을까. 그런데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도움을 받아 이렇게 무사히 도착하는 날이 오다니. 조용히 무릎을 꿇고 간절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신께, 아빠에게, 이곳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지친 나에게 조용히 힘이 되어주던 이름 모를 들꽃과 바람과 하늘까지... 이 길이 보여준 모든 경이로운 순간들에게.     


  미사 중에는 신부님께서 이날 도착한 순례자들의 이름과 국적을 불러주는 특별한 시간도 있었다.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꼬레아나'는 확실히 들렸다. 언니와 동시에 얼굴을 쳐다보았다. 또 한 번 울컥했다. 말이 필요 없었다. 우린 그저 서로 눈을 마주치고 씨익 웃었다. 


  '다정아, 들었지?' 

  '언니, 우리 드디어 왔다. 고마워!'     


  미사가 끝나자 성당 앞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모두가 환희와 감격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나의 친구들, 나의 기적들도 함께 기뻐하고 있었다. 우리는 산티아고 시내 곳곳을 우르르 몰려다니며 완주의 기쁨을 누렸다. 스페인에서는 사진을 찍을 때 김치 대신 ‘빠따따~~(감자)’라고 하는데 이날 평생 외칠 감자를 다 외쳤다.     


  좋은 식당에서 거하게 점심도 먹었다. 당장 내일부터 걷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에 떠들썩한 수다가 이어졌다. 즐겁고 신나는 분위기 속에서도 이별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애써 잊으려는 듯 우리는 끊임없이 웃었고 끊임없이 잔을 부딪히며 ¡Salud!을 외쳤다.


  폰세바돈에서 잠시 만났던 찬희 언니는 오늘만큼은 등산복을 입고 싶지 않다며 나의 후드티를 빌려 갔다. 평소라면 절대 입지 않았을 촌스러운 후드티였지만 언니는 무려 한 달 만에 입어보는 평상복이라며 행복해했다.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하더니 나에게 가리비 모양의 귀걸이를 선물해 주었다. 가리비 목걸이에 이어 소중한 기념품이 또 하나 내 손에 쥐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길에서는 받기만 했다. 욕심을 내며 이것저것 사지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친절과 마음만 내어주면 항상 그 이상의 무언가가 돌아왔다. 산티아고 거리에 기념품샵이 넘쳐났지만 한 군데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미 넘치도록 받았고 정말이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귀걸이를 한참 들여다보던 바로 그때, 어디서 “홍다정!” 하고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 내 이름이 불릴 리가 없으니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하다가 세 번째 부르는 소리에는 ‘어? 내 이름인데?’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에! 그곳에 안 선생님이 서 계셨다.      


  까리온에서 언니와 내가 버스를 타고 레온으로 이동하며 헤어진 뒤 만나지 못했던 선생님이었다. 얼마나 부지런히 걸으셨기에 오늘 산티아고에 도착하신 걸까? 역시 문제는 우리의 체력이었나? 아무렴 좋았다. 마지막 날 생각하지도 못했던 안 선생님을 다시 뵐 줄이야!


  안 선생님은 오늘쯤에 내가 도착하겠다 싶어 계속 순례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살피며 나를 찾으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갑자기 메세타에서 밤중에 나를 찾아 나서시던 모습이 또 생각나 뭉클해졌다. 내가 뭐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찾겠다고 애써주시는 그 마음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성당 앞 오래된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그 옛날 지치고 배고픈 순례자에게 공짜로 음식을 대접하던 전통을 이어 지금도 공짜로 식사가 가능한 곳이었다. 이런 아름다운 전통을 보았나! 우리는 (결코 공짜가 반가워서가 아니라) 그 아름다운 전통을 잇는 차원에서 저녁 만찬을 경건하게 즐겼다.      

  어느덧 산티아고에도 캄캄한 밤이 찾아왔다. 몸은 피곤했지만 어쩐지 이대로 잠들 수는 없는 밤이었다. 우리는 무엇에 이끌리듯 다시 성당 앞으로 갔다. 환희와 감동의 열기로 가득 찬 낮의 풍경과는 달리, 조용하고 쓸쓸한 분위기 속에서 성당은 빛을 받아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차디찬 광장 돌바닥에 언니와 나란히 앉아 말없이 성당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떠오르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도, 친구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뜨겁고 칼칼한 국물이었다.    

  

  “다정아, 저~기 가서 오뎅탕 좀 끓여와 봐. 소주 한잔하게.”

  “아악!! 언니!! 오뎅탕 이야기 왜 해요! 아 진짜 먹고 싶잖아. 망했어! 책임져!!”   

  

  우리는 언제나처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간절한 오뎅탕 생각을 겨우 겨우 떨쳐내니 그제야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깊어 오뎅탕에게 잠시 순서를 밀린 것뿐이었다.      


  내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언니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우리는 서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그 마음을 이야기하며 언니도 울고 나도 울었다.    

  

  산티아고 대성당 위에 뜬 달빛이 참 따뜻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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