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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정 Sep 07. 2023

나초, 베로니카

Nacho, Veronica from Spain

  트리아카스텔라 알베르게에서 국제 부부가 주신 맥주에 간식을 먹고 있을 때 똑똑~ 노크를 하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비아브랑카 알베르게부터 친해진 발렌시아에서 온 커플이었다. 남자는 스페인의 전형적인 훈남상이었고 여자는 호탕한 웃음과 시원시원한 성격이 볼수록 매력적이었다. 이들이 바로 나에게 찾아온 아홉 번째 기적, 나초와 베로니카이다.       


  서로 거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웃음이 가득했던 그 날밤 우리들의 수다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나초는 구급차 드라이버이고 베로니카는 간호사라고 했다. 구급차에서 싹튼 사랑이라니. 그 러브스토리가 너무나 궁금했지만 언어의 한계로 더 이상 알 수는 없었다.


  트리아카스텔라를 떠나 사리아Sarria로 가며 우리가 선택한 길은 산실 루트. 책에서 추천하지 않는 루트였지만 우리는 무려 6.5km나 더 짧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대부분 아스팔트 길이라서 추천하지 않는다고? 무슨 소리야~ 아스팔트가 더 좋아~~ 돌길은 내 발이 내 마음대로 안가~~ 언니와 나는 이럴 때 쿵짝이 제일 잘 맞았다.     


  아스팔트를 지나, 낙엽이 깔린 끝없는 오솔길도 지나, 이번엔 소들과 함께 걷는 길이었다. 이곳에서 만나는 동물들은 순례길을 걷고 있어서 그런지 왠지 더 평화로워 보였다. 문제는 여기저기 깔린 소똥, 말똥들! 소똥 옆 돌담 위에 쭈그리고 앉아 밥을 먹었다. 밥을 먹는다기보다는 배를 채운다는 말이 맞는 조촐한 한 끼였지만 우리에겐 고추 피클이 있었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좋다더니, 어느새 우리와 영혼의 단짝이 된 이 고추 피클과 함께라면 소똥 밭을 굴러도 산티아고가 좋구나!   

  




  소똥 피하기 스킬을 연마하며 도착한 사리아 알베르게는 나초와 베로니카를 포함해 먼저 도착한 순례자들의 목소리로 떠들썩했다. 오늘 중요한 축구 경기가 있어서 단체로 근처 식당에서 축구를 보기로 했다며 들뜬 모습이었다.      


  그런데 알베르게 통금 시간이 문제였다. 그들은 알베르게가 닫히면 담이라도 넘고 2층 창문에 밧줄을 연결해 들어가겠고 했다. 멀쩡한 남자 셋이서 땅에서 창문까지 얼마나 되는지 진지하게 측량을 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실감이 났다.     


  ‘아, 맞다! 내가 스페인에 와있었지. 축구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정으로 미쳐있는 곳, 스페인!’


  늦게 도착한 우리까지 합석해서 그날 밤 식당을 전세라도 낸 듯 부어라 마셔라 한바탕 재미있게 놀았다. 술 한 잔씩 들어가고 취기가 오르니 다들 진지한 순례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특히 베로니카의 밝고 씩씩한 에너지가 그날의 분위기를 더 좋게 만들었다. 역시 스페인 훈남을 차지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 중 바르셀로나에서 온 젊은 커플도 있었다. 여자의 직업은 무려 바르셀로나의 바텐더. 순례자가 이렇게 예쁘면 반칙이다. 얼굴은 저러다 소멸하는 것이 아닌가 싶게 작고 이목구비는 자기주장이 심하게 강했다. 


  자전거로 순례를 하던 형제도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 보통 자전거 순례자는 도보 순례자가 이틀 동안 갈 거리를 하루 만에 이동했다. 덕분에 길 위에서 헤어진 도보 순례자들의 메신저 역할도 하곤 했는데, 우리에게 며칠 전 한국인을 만났다며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폴더폰인 그의 휴대폰 안쪽에 노란색 메모지가 소중하게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메모지에 쓰여 있는 왠지 익숙한 글씨. HUN? 바로 상훈이었다. 자전거 순례 형제 덕에 보고 싶은 상훈이의 소식을 이렇게 듣다니! 언니와 나는 반가움에 소리를 지르며 메모지를 사진으로 찍었다. 지금은 SNS를 이용해 순례자들끼리 실시간으로 안부를 주고받는다고 하는데 과연 자전거 순례자들에게 실려 전해진 안부만큼 반가울까? 아무렴 편리함은 낭만을 이길 수 없다!    

  

  한편 나는 노란 화살표가 그려진 모자를 사서 친구들에게 사인을 받았다. 자전거 형제에게도 사인을 부탁하니 초집중해서 한참 동안 물고기 한 마리를 그리는 게 아닌가. 사인에 이토록 진심이라니. 그제야 상훈이가 쓴 메모지 한 장이 그토록 소중하게 그들의 휴대폰에 간직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작은 것에도 정성을 다하는 그들은 인생에서 무엇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병나발을 불고 ‘¡Salud!’(건배)를 외치는 친구들에게 이미 축구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식당을 나서면서 주인아저씨와 마치 10년은 알고 지낸 단골들 마냥 껴안고 쪽쪽 거리며 거창한 인사를 나눈 지 30분이 지났을까. 그제야 축구 중계가 나오는 TV를 발견하고는 “아~ 맞다~ 우리 축구 보러 왔었지?” 하고 잠시 눈길을 주는 대책 없는 친구들. 축구~ 축구~ 노래를 부르며 창문까지 측량하던 열정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나는 점점 알다가도 모를 그들의 매력에 빠지고 있었다.     


  다행히 알베르게 문이 열려있어 밧줄을 타고 창문을 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광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떠들었고, 다음날 언니에게 들으니 바르셀로나에서 온 커플이 그 좁은 싱글 침대에서 한 시간 넘게 찐한 사랑을 나누었다고 했다. (언니 나 안 깨우고 뭐 했어….) 제일 웃긴 건 그 와중에 우리의 71세 독일 할머니는 바로 옆 침대에서 너무 곤~히 ‘딥슬립’하셨다는 사실. 정말 건강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라며 언니가 혀를 내둘렀다.      


  찐한 사랑을 나누던 바르셀로나 커플은 그 후 헤어졌는지 그녀의 SNS에는 다른 남자친구가 보였다. 한편 그런 불타오르는 열정은 없었지만 서로를 은근히 챙기며 장수 커플의 위엄을 보여주던 나초와 베로니카는 그 후 결혼에 골인했다! 그리고 2년 뒤 이들을 꼭 닮은 주니어까지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 날이 왔다. 순례는 끝났지만 그렇게 그들의 사랑도, 우리의 우정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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