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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정 Sep 05. 2023

리암, 카렌 2편

Liam, Karen from Ireland, Denmark

  루이테란에서의 달콤한 ‘호강Day’를 즐긴 다음날, 우리 앞에는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까지 30km가 훌쩍 넘는 험한 산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리용 팩 와인을 뜯어 올라코가 선물한 물병에 담는 신성한 의식에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지켜보시던 할머니가 깜짝 놀라셨다.     


  “Oh, baby~ 이거 그렇게 마시는 거 아니란다. 요리할 때 쓰는 거야.”


  이 와인은 마시는 용이 아니라 나에게 진통제와도 같다고, 이것이 없으면 어깨부터 발목까지 온몸이 아파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다고 설명해 드렸지만 끝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조금이라도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팩에 남은 와인을 한입에 털어 넣고 씩씩하게 웃어 보이며 출발했다.    

 

  어제 쉰 대가로 우리는 바르에서 잠시 쉴 여유도 없이 계속 걸어야 했다. 여전히 산 중턱이고 마을은 보이지도 않는데 벌써 해가 저물고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야속한 표지판은 아직 목적지까지 9.7km나 남았다고 알려줄 뿐이었다.      


  그때부턴 언니랑 거의 바짝 붙어 걸었다. 어둠이 사람을 얼마나 두렵게 하는지 메세타 조난 사건으로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해져서 내 휴대폰 손전등 기능에 의지하며 겨우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혼자가 아니라 공포는 덜했지만 어둠 속에 폐허 같은 마을을 지날 땐 둘이라도 무서웠다.      


  우리는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노래를 부르다가 급기야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으로 시작하는 군가를 개사하여 부르기 시작했다.      


  “까미노! 산티아고! 갈 길도 멀다만~ 너와 나, 서로를 믿고 오늘도 걷는다~ 알베르게! 레스또란또! 도대체 어디냐~ 부모 형제 보고 싶다~ 참말로 보고 싶다~”     


  이 노래의 포인트는 절규하듯 외치는 ‘알베르게! 레스또란또!’이다. 우리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절대 레스토랑이라고 하면 안 된다. 힘을 주어 또박또박! ‘레·스·또·란·또!!’라고 불러야 제맛이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언니와 나는 이 노래를 산티아고 지정곡으로 널리 퍼뜨려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외치곤 한다.     


  드디어 트리아카스텔라에 진입. 초입에 불 켜진 알베르게가 보여 무조건 들어갔다. 사립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자자면서. 그곳에서 또다시 우릴 반겨주는 국제 부부! 6시쯤 도착하셔서 우릴 계속 기다렸다며 안아주셨다.      


  도대체 우린 왜 엄마뻘 속도도 못 따라가는 저질 체력인가 잠시 한탄하며 침대에 뻗어 버렸다. 누군가가 발바닥을 사정없이 망치로 때리는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저녁을 먹을 힘도 없었지만 그래도 먹고살겠다고 소원하던 레·스·또·란·또!!에 갔다. 그랬더니 이번엔 71세 우슬라 할머니가 우아하게 식사를 하고 계시는 게 아닌가!! 이렇게 우리의 체력은 아줌마뻘도 아닌, 할머니뻘에도 한참 못 미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분들 혹시 택시 타고 오신 거 아니냐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우린 서로를 위로하며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탁자 위에 국제 부부가 우릴 위해 두고 간 맥주 두 캔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알고 보니 국제 부부의 아드님이 중국인 여자와 국제결혼을 했다고 하셨다. 아빠의 사랑꾼 유전자를 이어받아 대를 이어 국제결혼을 하다니! 역시 로맨틱한 가족이었다. 국제 부부가 우리를 아껴주시고 볼 때마다 챙겨주신 것은 어쩌면 동양인 며느리가 생각나서 일지도 모르겠다.     

 

  한눈에 반했던 아름다운 아가씨의 얼굴에는 함께한 세월만큼 많은 주름이 생겼지만 여전히 그녀를 보는 그의 눈은 사랑으로 가득했다. 나이도 국경도 뛰어넘은 열정적인 사랑의 자리에 이제 서로를 향한 배려와 신뢰가 단단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된 그들이 손잡고 함께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그 길은 더 이상 마주 보고 걷는 길이 아니라,      


  같은 곳을 보며 천천히 오랫동안 함께 걷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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