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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정 Aug 21. 2023

리암, 카렌 1편

Liam, Karen from Ireland, Denmark

  힘든 산행 끝에 만난 안갯속 마을에서 딱 멈추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7km만 더 가면 폰페라다. 그곳에서 언니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가 나를 다시 일으켰다. 가파른 산에서 내려온 직후라 평탄한 길을 걸어도 계속 내리막을 걷는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때 오가며 만났던 중년의 부부가 다시 나타났다. 풀밭에서 오순도순 점심을 드시는 모습이 그림 같던 부부였다. 부모님 나이대의 분들이라 그런지 다시 만나자마자 나도 모르게 철없는 딸이 말하듯 투정이 나왔다. 폰페라다까지 7km 남았다는데 언제 가겠느냐며 울상을 짓는 나에게 아주머니가 정색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Oh, baby~ No, No~~ 내가 확신하는데 7km는 절~대로 아니야. 한 5~6km 남았어.”      


  잠깐, 6km나 7km나 그게 그거 아닌가?! 어찌나 진지하게 말씀을 하시는지 순간 깜박 속을 뻔했다. 귀여운 이분들이 바로 나에게 찾아온 여덟 번째 기적, 리암과 카렌이다.       


  남편인 아저씨는 아일랜드 사람이고 그의 아내는 덴마크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언니와 나는 이분들을 국제 부부라고 불렀다. 아주머니가 나이는 드셨지만 정말 고우셔서 젊었을 때 한 미모 하셨을 것 같았다. 그러니 연하인 아일랜드 아저씨가 국경도 나이도 상관없이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골인한 거라고 언니와 나는 이미 상상 속에서 연애소설 한편을 완성하던 차였다.     


  이분들의 격려 아닌 격려 덕분에 지칠 대로 지친 발을 질질 끌고 드디어 폰페라다에 도착했다. 이틀 만에 만난 언니 품에 폭 안기니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오랜만에 언니가 해주는 볶음밥을 먹고 (역시 밥이 더 그리웠나?) 떨어져 있던 이틀이 20년이라도 되는 듯 수다를 떨었다.   

  

  언니는 이틀 연속 머물 수 없는 알베르게 규칙 때문에 하루는 무려! 35유로짜리! 호스텔에서 제대로 따뜻하게 잤다고 했다. 이틀 동안 속세를 달콤하게 느끼고 요양한 언니가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길을 나서며 비장하게 말했다.     


  “다정아, 나는 지금 속세에서 다시 절로 들어가는 수행자가 된 것 같아. 따뜻한 호스텔에서 반신욕하던 순간은 한낱 일장춘몽이었구나.”     


  지금 내가 언니 나이가 되고 보니 그때 언니가 35유로짜리 호스텔의 유혹을 끊고 다시 5유로짜리 알베르게를 전전하는 것은 마약을 끊는 것보다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성하지 않은 발로. 어쨌든 나는 언니와 다시 걷게 된 그 길이 콧노래가 나올 만큼 좋았다.     


  점심은 길바닥에 내 판초 우의를 깔고 빵과 와인으로만 먹었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스쳤는지 언니가 또 비장하게 말했다.


  “다정아, 우리가 어느새 예수님이 주신 몸과 피만 먹는 진정한 가톨릭 신자처럼 생활하고 있어. 역시 우리는 참된 순례자야!”     


  아니, 방금 전에 절로 수행을 떠난 분이 아니었나? 갑자기 미사 중 성찬의 전례를 하는 신부님처럼 예수님의 거룩한 양식을 말하는 언니가 너무 웃겨서 마시던 와인을 뿜을 뻔했다. 하지만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되기에는 신앙심이 부족했던 걸까. 우리는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중국집에 전화해서 짬뽕 좀 배달시켜 먹자고 헛소리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명이 다한 듯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작은 온풍기 하나가 유일한 난방 기구였던 비아브랑카Villafranca del Bierzo 알베르게가 보아디야의 이글루에 이어 최고로 추운 알베르게에 등극했다. 다음날 추위에 지친 언니와 나는 계획에도 없던 루이테란Ruitelán 마을에 멈춰 섰다. 아직 한낮의 햇살이 따뜻할 때 알베르게에 짐을 푼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늘 20km 정도만 걷는 게 언니와 나의 소원이었는데 드디어 그 소원을 성취한 것이다.      


  왠지 모르게 이 알베르게는 분명 따뜻할 것 같았는데, 들어서자마자 그런 직감이 든 이유를 알게 되었다. 리암과 카렌이 아빠처럼, 엄마처럼 따뜻하게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도 우리와 같은 순례자이고 이곳을 선택해 묵는 것뿐이었지만 환한 미소로 우리를 두 팔 벌려 맞이해주시니 그런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언니와 이날을 ‘호강Day’로 잡고 무려 빨래 서비스도 받았다. 8유로인데 언니가 한턱냈다. 케케묵은 빨래가 세탁기에서 돌아가는 동안 응접실 탁자에 앉아 아저씨가 주신 과자와 땅콩을 먹으니 세상에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심심해서 방명록을 뒤적거리고 있으니 반가운 한글이 보였다. 7유로 주고 스페인 어디서도 이런 식사를 할 수 없을 거라며 이 알베르게에서 저녁 식사를 꼭 먹으라고 당부하는 글이었다. 해외에서는 자고로 동포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바로 저녁 식사를 예약했고 역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최고의 만찬이 나왔다.     

 

  무려 언니랑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던 짬뽕 국물이 나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까미노 매직~! 매콤하고 칼칼한 국물이 약간 덜 매운 짬뽕이나 다름없는 국을 시작으로 샐러드, 빵, 와인, 까르보나라가 이어져 나왔고 디저트로 비스킷이 올라간 달달한 푸딩까지 제공되었다. 


  국제 부부와 우슬라(독일에서 온 무려 71세의 할머니) 그리고 언니와 나. 이렇게 단출한 멤버로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먹는 분위기가 그날의 식사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었다. 전날 떠들썩한 파티가 열렸던 비아브랑카보다 시골 할머니 집에 놀러와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먹는 것 같은 이곳이 훨씬 좋았다.      


  하지만 이 친근한 할머니들에게 끝내 친근해질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남녀 공용 알베르게에서 아무렇지 않게 훌렁훌렁 탈의하시는 모습이었다. 같은 여자인데도 속옷만 입은 채 유유히 돌아다니시는 할머니들을 보면 괜히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했다.      


  세상 쿨한 이 할머니들과는 달리 뼛속까지 유교 정신이 박힌 나는 완벽하게 옷을 입은 채 샤워실에서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빨래한 속옷을 대놓고 널지도 못했다. 당연히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하면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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