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iel, Sebastian from Germany
바르에서 나오자마자 사라진 그들 덕에 또다시 혼자 걸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화살표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메세타 조난 사건 이후로 혼자 걸을 때면 오로지 화살표에 집중하며 걸었는데…. 저 멀리 갈림길이 보였다. 또다시 그날의 악몽이 떠올랐다. ‘저 갈림길에 화살표가 없으면 난 망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갔더니 화살표는 없고 웬 돌들만 잔뜩 있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이제 돌무더기만 봐도 식은땀이 났다. 어디서부터 또 길을 잘못 든 것인지 자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만, 돌무더기를 자세히 보니 그 돌들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화살표 모양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단 대사관 직원들과 다시 통화할 일은 없겠구나 싶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나니 그제서야 앞서간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이 밀려왔다. 나와 같이 표지석도 없는 갈림길에서 당황할 사람들을 위해 하나씩 돌들을 가져다 놓았을 수많은 순례자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도 주변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찾아 보태어 놓으며 생각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혼자 막막할 때,
늘 함께하던 화살표마저 보이지 않을 때.
그때는 가만히 숨을 고르고 들여다보자.
앞서간 이들의 마음이 모여 나를 안내하고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고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니 꽤 더웠지만 메세타의 비, 안개, 바람 쓰리 콤보 날씨보다야 백배 천배 고마운 날씨였다.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혼자 헉헉대며 산길을 오르니 드디어 산 정상과 가까운 곳에 폰세바돈Foncebadón마을이 나타났고 그 속에 산장 같은 알베르게가 있었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작 도착해 쉬고 있는 투 저먼스. ‘이 의리도 없는 것들아! 너희는 그 험한 산길을 혼자 뒤에서 걷고 있는 내가 걱정도 되지 않더냐? 보조 좀 맞춰주면 어디가 덧나냐?’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에게 괜히 심통이 났다가 곧 헛웃음이 났다. 20여 일을 매일 함께 걸어도 서로 무뚝뚝한 그 남자들에게 하루 이틀 함께한 내가 지금 뭘 바라고 이러나 싶었다.
알베르게 주인이 직접 만들어주는 저녁 코스 요리가 있다고 해서 주문을 하고 벽난로 앞에 앉아 피곤함을 녹이고 있으니 어느새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냄새에 홀려 주방으로 가보니 주인이 장인 정신을 담아 커다란 솥뚜껑처럼 생긴 냄비에 빠에야를 만들고 있었다. 즉석에서 만든 빠에야, 신선한 샐러드, 요구르트에 달달한 꿀까지 섞어 디저트로 먹으니 언니와 오늘 이 만찬을 함께하지 못해 아쉽기만 했다. (그런 것치고 모든 메뉴를 두 그릇씩 너무 잘 먹긴 했다.)
늘 함께 자던 언니와 떨어졌기 때문일까, 내일이면 철 십자가에 도착하기 때문일까. 저녁 만찬 후 괜히 마음이 울적해졌다. 언니와 함께였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그런 밤이었다. 하지만 내 앞에는 이런 내 마음을 절대로 알 리 없는 투 저먼스가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내 마음을 조잘조잘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새 미운 정이 들었는지 그들이 나란히 앉아있는 풍경 자체가 나를 달래주는 것 같았다.
나에게 휴대폰 충전기를 빌려 갈 때만 웃어주는 것 같지만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의 세바스티안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 옆에서 다니엘은 힘들게 산행하는 세바스티안을 재미있는 커리커처로 그리고 있었다. ‘걸을 때는 서로 말 한마디도 안 해서 싸우기라도 한 줄 알았더니 서로 되게 위해주면서 가고 있구나.’ 반전이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자꾸만 반전을 선사한 이들이었다. 둘의 관계도 반전, 징계 대신 기회를 준 세바스티안의 학교 이야기도 반전, 다니엘의 그림 실력도 반전. 무엇보다 함께 걷던 언니가 사라진 빈자리를 이 무뚝뚝한 두 독일 남자들이 채워준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반전이었다.
반전의 반전이 계속되는 길.
마성의 산티아고 순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