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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정 Aug 16. 2023

철 십자가, 작고 완벽한 위로

  이 길을 지나간 수많은 순례자의 사연을 간직한 철 십자가. 나 역시 이 철 십자가에 이끌려 머나먼 스페인 땅 하고도 이 깊은 산골짜기까지 오게 되었다. 나를 이 길에 서게 하고 두 발로 걷게 한 바로 그 철 십자가를 드디어 만나게 되는 날이었다.     


  전날 밤 폰세바돈 알베르게에서 아빠에게 긴긴 편지를 썼다. 아빠 사진과 함께 편지를 봉투에 넣고 알베르게 주인아저씨에게 빌린 테이프로 단단히 봉했다. 그리고 겉에는 아빠가 행복할 수 있도록 이곳을 지나는 많은 분들의 기도를 부탁한다고 적었다. 진실한 소망들이 돌들처럼 겹겹이 쌓여 언덕을 이룬 이곳에서, 그 기도를 아빠에게 선물하고 싶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그러고는 침대에 누워 울컥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살짝 울다가 역시 너무 피곤해 급 잠이 들었다. (불면증이 있는 분들께 산티아고를 강력히 추천한다.)  

   

  다음 날 아침 식사도 단 3유로에 시리얼, 요구르트, 핫 초코, 과일에 빵까지 푸짐하게 제공되었다. 3유로의 행복이라 느끼며 열심히 먹고 나니 커피가 가득 담겨있는 큰 보온병이 보였다. 살짝 고민하다가 커피를 내 물통에 조금 덜어 담는데 그 순간 주인아저씨 친구에게 딱 걸렸다. ‘어허 세뇨리타, 3유로에 그만큼 먹었으면 됐지. 그것까지 챙기는 건 좀 아니잖아?’라고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표정과 제스처. 민망하게 웃으며 보온병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니 아니 이 커피가 뭐 얼마나 한다고 저렇게 무안을 주는지 순간 마음이 상했다. 

 

  철 십자가를 앞에 두면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는데 웬걸 아주 꿀잠을 잤다. 그곳을 향해 걷는 아침은 신성한 생각들로 가득할 것 같았는데 신성함은커녕 아침에 나에게 무안함을 준 아저씨에 대한 서운함만 가득했다. 이처럼 인생 전체를 흔들 만큼 큰일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당장 내가 느끼는 사사로운 감정만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아빠가 없는 세상에서 행복이란 없을 것 같았는데 또다시 행복을 찾고 일상을 살아낸 것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하루하루 잘 살아내면 되겠지 생각하니 철 십자가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리고 드디어 청명한 하늘 아래 우뚝 서 있는 철 십자가가 보였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은 그 아래 수많은 돌로 향했다. 그 돌 위에 쓰여 있는 누군가의 이름부터 돌 틈 사이사이 꽂혀있는 누군가의 사진까지. 어느 것 하나 애틋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애틋한 마음을 이곳에 어렵사리 내려놓고 갔을 순례자들을 생각하니 한없이 마음이 시렸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예쁜 하트 조형물 아래 편지를 묻고 돌들로 차곡차곡 쌓았다. 어젯밤 아빠의 사진을 괜히 넣은 것일까. 꼭 이곳에 아빠를 혼자 남겨두고 떠나는 것 같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분명 내 발인데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꺼이꺼이 울고 속 시원하게 털면 다시 걸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눈물도 나지 않고 마음만 심란할 뿐이었다.      


  그렇게 30분쯤 서성거렸을까. 어디선가 시원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살며시 불어왔다. 문득 내가 이곳에 아빠 사진을 묻고 간다고 해서 아빠를 두고 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를 보러 납골당에 갈 때도 우리 아빠는 이 좁고 답답한 공간에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누구보다 자연을 사랑하고 여행을 좋아하던 아빠였다. 주말이면 늘 산에 가셨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의 손에는 늘 나에게 줄 고르고 고른 예쁜 단풍잎이나 머루며 다래 몇 알이 들려 있었다. 여름이면 우리 가족은 집 근처 강에서 밤새 낚시를 했고 겨울이면 겨울 바다의 낭만을 찾아 동해를 찾았다.

      

  그런 아빠는 바람이 되어 여전히 산으로 들로 바다로 자유롭게 다닐 것만 같았다. 그렇게 실컷 세상 구경하다가 딸이 그토록 오고 싶어 한 이곳에서 잠시 머물며 한숨 돌리시겠지. 그리고 또다시 훨훨 자유롭게 떠나시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떼어지지 않던 발걸음이 신기하게 떨어졌다. 바람결을 타고 내 곁에 온 아빠가 이제 그만 툭툭 털고 또 세상 구경하러 가자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철 십자가와 바람이 전해준 작은 위로가 나에게는 더없이 큰 힘이 되었다. 그 힘으로 남은 길도, 앞으로의 인생도 뚜벅뚜벅 잘 걸어 나갈 것이라 다짐했다.     



  철 십자가를 뒤로하고 걷는 길, 아빠 생각마저 뒤로 하긴 싫어 실컷 아빠를 떠올리고 추억하고 그리워했다. 아빠를 갑자기 떠나보냈을 때 사실 슬퍼할 시간도 별로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장 발등에 떨어진 기말고사가, 1년 후의 수능시험이 그럴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타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 홀로 남은 엄마와 겨우 중학생인 동생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엄마의 슬픔과 걱정을 그나마 덜어드리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 직장까지 잡고 돌이켜보니 그때 엄마, 동생과 함께 살면서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지 못했던 시간이 나에게는 깊은 상처가 되어 있었다. 꿈에서라도 아빠가 보고 싶어서 울다 잠든 날도 많았는데 야속하게도 아빠는 꿈에 나오지 않았고 그런 것이 당연하고 익숙해질 때쯤 나는 더 이상 울면서 잠들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 길에서 작정을 하고 아빠 생각을 많이 하니 그렇게 나오지 않던 아빠가 꿈에 두 번이나 나왔다. 생전의 그 아이같이 순수한 모습과 환한 미소를 띤 채 잔뜩 들떠있는 목소리로 나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계셨다. 정말 딱 아빠 같은 모습이었다. 이상하게 슬프지가 않았다. 이곳에서 내가 아빠 생각을 많이 하니까 그동안 딸내미에게 서운했던 것도 잊고 신나서 이렇게 꿈에도 나타나시는구나. 아빠에게 고마웠고, 그런 시간을 내어준 이 길에도 고마웠다. 이제야 내 안의 상처가 조금씩 아무는 느낌이 들었다. 일상에 쫓겨 혹은 이제 괜찮을 때도 되었다며 애써 밀어두었던 나의 감정들을 하나하나 만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이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했다.     


  또다시 오르막 산길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힘든 산행의 고단함을 잊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저 멀리 산허리에 가득한 구름이었다. ‘저게 구름인가? 호수인가? 백두산 천지 같은데? 구름이 어떻게 저렇게 선명하게 내 눈 아래 있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나는 구름인지 호수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경치에 완전히 빠져 걸었다. 


  이번에는 내리막이다. 거대한 구름을 눈 아래서 한번 보고, 내 옆에서 한번 보고, 마침내 그 속으로 완전히 걸어 들어가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멀리서 볼 땐 멋지기만 했는데 막상 구름 속으로 들어와 걸어 보니 산길이 생각보다 험하고 화살표가 잘 보이지 않아 긴장하며 내려왔다. 허둥지둥 산길을 내려오니 안개 가득한 마을이 나타났다. 그리고 저 아래 벤치에 앉아 ‘어이구, 내려오느라 애썼네.’ 하고 손을 흔들어주시는 동네 할머니들이 보였다. 그 순간 어찌나 반갑고 안심이 되던지.     


  그 옆에 아빠도 앉아 손을 흔들어주는 것 같았다.      

  우리 딸 수고했다고, 여기까지 오느라.     

  앞으로도 걱정하지 말라고, 아빠가 옆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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