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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정 Oct 10. 2023

길 위의 행복

by. 김민정

  부르고스에서 시작된 산티아고 순례도 어느새 5일째로 접어들었다. 설렘과 긴장감으로 길을 걸었던 초반 순례길을 벗어나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낯선 상황에 적응도 되어가니 오늘은 그간 쌓인 피로감이 갑자기 엄습해왔다.     


  겨울철 순례길은 공지도 없이 문을 닫는 공립 알베르게가 드문드문 있어서 구간 계획을 상황에 따라 수정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수십 km를 걸어 도착한 숙소가 문이라도 닫은 날엔 어쩔 수 없이 다음 숙소까지 수 km를 또 이동해야 해서 일몰시간과 숙소 간 거리를 잘 계산해야 한다. 특히 스페인의 북쪽 지방은 겨울이 되면 우기로 접어들어 한 달에 20여 일은 비가 오니 춥고 어두운 길 위에서 비라도 만나게 되면 성인의 순례길은 생사를 오가는 지옥 길이 되는 것이다.


  그날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3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순례 초반, 데드라인을 오후 3시로 정하고 그 시간이 가까워지면 순례를 중단하고 근처 알베르게를 찾아 이동하기로 나름의 계획을 세웠던 터였다.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까리온 공립 알베르게가 있었다. 아치형으로 된 고풍스러운 알베르게의 입구에 들어서니 낡은 책상에 앉아 있던 수녀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녀의 평온한 미소가 세상 피곤을 다 잊게 했다.      

 

 ‘이렇게 나를 기다려준 곳이 있구나.’      


  수녀님이 손가락으로 1을 표시하며 연신 “우노, 우노”라고 하는 걸 보니 내가 오늘 이곳을 찾은 첫 번째 순례자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신 듯했다. 이른 시간이 아닌데도 아직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인기가 없는 알베르게라는 뜻이기도 하다.


  숙박비를 지불하고 크레덴시알에 도장도 찍고 나니 수녀님께서 숙소 건물로 직접 안내를 해주셨다. 1층 식당을 함께 둘러보고 3층에 침실과 샤워장이 있다는 설명을 듣고 나니 벌써 날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건물 옆쪽으로 난 야외 철제 계단을 오르면 숙소로 들어가는 계단인데 오래된 건물치고 제법 규모가 크고 층고도 높아 계단이 제법 많았다. 


  빨간색 야외 철제 계단을 이용해 숙소가 있다는 3층 입구에 다다라 출입문을 여니 눈앞에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긴 복도가 나타났다. 퍼뜩 세계대전 중 병원으로 이용되었다는 가이드북의 설명이 떠올랐다. 마치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듯 기분이 묘했다. 건물 안쪽으로 몇 발짝 걸음을 옮기자 ‘덜커덕’하고 문이 닫혔다.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이 큰 건물 안에 나밖에 없구나.’      


  침실이 있는 복도 끝까지 걸어가는 몇 걸음의 시간이 마치 슬로우 모션을 걸어 둔 것처럼 길고 느리게 느껴졌다.     


  ‘하… 씨, 무섭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기분이란 말인가. 순례자가 알베르게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고 뭐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가끔 깜깜한 밤길을 혼자 걷다가 머리카락이 쭈뼛 서며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볼 때가 있지 않나. 나름 담력이 좋기도 하지만 또 정의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니 설령 귀신이 있다고 해도 나를 해치러 올 이유가 전혀 없기에 ‘아무 이유 없이 무서움을 느끼진 말자!’ 주의로 살아온 나다.     


  ‘나는 신의 길을 걷는 순례자다!’      


  마음을 다독이며 복도 끝에 다다르니 병상 같은 수십 개의 침대가 주르륵 줄 맞춰 늘어선 큰 방이 나를 맞았다. 두 층을 합쳐놓은 듯 높은 층고에 방벽과 천장은 온통 새하얀 페인트칠이 되어있고 아이보리색 침대 시트는 날이 서 있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온기가 전혀 없었다. 벽 쪽에 붙은 몇 개의 라디에이터가 돌아가는 소음이 들리긴 하지만 왠지 모를 한기가 느껴지는 이 방에서 당장이라고 뛰쳐나가고만 싶었다.   




  ‘아씨. 왜 무섭지? 아까보다 더 무서운데…. 나갈까? 어쩌지?’     


  머리는 갖가지 생각들로 복잡한데 내 몸은 어느새 배낭을 내리고 등산화를 벗고 세면도구와 수건을 꺼내 놓고 있었다. 괘씸하다. 머리는 생각이 가득한데 몸뚱이가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제 마음대로였다. 아닌 게 아니라 발바닥 물집을 초반에 잡지 못해 발바닥 피부가 벗겨지는 부위가 점점 커지는 중이었다. 어쨌든 나는 오늘 이곳에서 하루를 쉬어야 한다고 생각이 정리되고 나니 급격한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몸을 데우고 나면 좀 괜찮아지겠지.’     


  또다시 복도를 나와 샤워장으로 향했다. 조명이 어두워서인지 아니면 병원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왠지 모르게 으스스하고 불편한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칸칸이 나눠진 샤워부스 중 가장 밝은 쪽 부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큰 건물 안 샤워장 한 칸에 혼자 샤워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인 듯 과장된 상상력이 공포심을 더욱 자극했다.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가 라디에이터에 젖은 양말을 널어놓고 침대에 걸터앉으니 걱정이 태산 같아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나는 이미 이 방의 기운에 완전히 눌렸다. 홀로 덩그러니 밤을 새울 상상을 하니 더욱 기가 막혔다. 

      

  ‘오늘 이곳에는 더 이상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일까?’     


  순례자들은 대부분 해가 지기 전에는 알베르게를 찾아 저녁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벌써 날은 저물었고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순례자가 찾아 올리는 만무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정말 혼자였다.     


  ‘성인의 순례길이니 순례자의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주시지 않을까?’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라도 할 판이었다. 순례길을 걷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었다. 간혹 바라는 것을 마음으로 빌어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간절히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건 처음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순례자가 길 위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신에게 기대는 수밖에.     


  ‘누구든 단 한 명이라도 이곳으로 좀 보내주세요. 혹시 지나쳐 갔다면 다시 발걸음을 돌려 세워주시고… 제발.’


  방안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라디에이터에서 들리는 소음도 잦아들고 이젠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엔 침실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침대로 자리를 잡았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차라리 입구가 보이는 안쪽 침대로 자리를 옮겨볼까? 벽 쪽으로 완전히 붙어있는 침대는 어때? 벽에 기대면 좀 나으려나?’     

 

  어떻게든 덜 무서울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보지만, 적막한 분위기는 더 고조되고 방안은 더욱 음침해지는 느낌이었다. 어찌해도 어차피 크게 달라질 분위기는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서 마을을 돌아다니면 기분 전환도 될 거고, 거리에서 사람들도 만나면 용기가 좀 나겠지.’


  저녁거리와 와인 한 병을 사려고 침실을 나섰다. 어두운 샤워장을 지나쳐 길고 긴 복도 끝 출입문을 열었다. 찬 기운이 코끝에 스쳤다. 낮에 올라왔던 빨간 철제 계단의 윤곽이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다. 조심스럽게 한 계단 한 계단 내딛는데 조용한 시골 마을이라 발을 디딜 때마다 울리는 철제 계단의 소음이 주변의 공기를 깨며 울렸다. 


  2층에 다다르니 아래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사람의 말소리였다. 1층 어딘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숙소동의 1층 공터는 알베르게 내부 시설이라 마을 사람들이 지나는 길목이 아니었다. 이건 분명 알베르게의 관계자이거나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순례자라는 말이다.      


  흥분됐다. 아래층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 사람들이 대화하는 말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남자와 여자의 음성이 섞여서 점점 더 또렷하게 들렸다. 영어에 스페인어, 또 한국어까지. 맙소사! 한국인이 있었다. 그러니 이들은 순례자가 분명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기도가 절로 나왔다. 어느새 철제 계단을 훑듯이 내려와 소리가 들리는 1층 공터를 내다봤다. 기적이 일어났다. 눈앞에는 단체 여행객이라도 되는 듯 여러 명의 무리가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웃고 있었다.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무려 다섯 명이다. 인기척이 났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심장이 쿵쾅쿵쾅 미칠 듯이 뛰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기, 한국 분 맞으시죠?”     

   “네. 저희 세 명, 모두 한국 사람입니다.”     


  얏~호!! 이게 무슨 횡재란 말인가! 순례자가 한 명도 아니고 무려 다섯 명. 거기다 세 명이 한국인이라니! 이건 기적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진짜 기적이 일어났다. 그저 사람을 만났을 뿐인데….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세상을 다 가진 듯이 행복했다.      


  ‘이들은 천사인 걸까? 신의 계시를 받고 나를 위해 이 먼 길을 내달려온 신의 천사들. 그것이 아니고서는 이 상황이 도대체 말로 설명이 안 된다. 어떻게 이렇게 멋진 일이 나에게 일어났지?’


  이날 알베르게에 도착한 인원은 총 5명으로 스페인인 40대 남성 1명과 이탈리아인 20대 여성 1명, 한국인 60대 남성 1명, 한국인 20대 남성과 여성 각 1명이었다. 나이와 국적까지 골고루 보내 주시다니 신께서는 인심도 후하시다. 든든했다. 세상 걱정 근심이 모두 날아갔다. 저녁거리를 사러 나가는 길이였지만 밥은 안 먹어도 될 것 같았다. 날아갈 듯 신나는 발걸음으로 나는 알베르게를 나섰다.     


  2012년 1월 3일.     

  이날은 산티아고 순례 중에 일어난 몇 가지 기적 같은 일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을 만난 날이다. 


  ‘한국인 20대 여성 1명. 이름은 홍다정.’     


  다정이와 나는 이날을 기점으로 총 14일을 함께 걸었다. 그리고 2012년 1월 17일,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함께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서로를 걱정하고 또 응원한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생에 가장 가슴 뛰는 여정을 함께해 준 나의 천사, 다정에게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날의 감격스러운 기억을 모두 담아 전합니다. 


  “저와 함께해 주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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