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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정 Dec 21. 2022

윤상훈 2편

Yoon Sanghoon from South Korea

  어스름한 저녁 무렵 근처 대형마트로 장을 보러 갔다. 한국에서는 대형마트만 가면 피곤해하던 나였는데 며칠 동안 시골길만 걷다가 마트에 들어오니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식재료나 와인이 한국보다 훨씬 저렴했다. 한가득 장을 봐와서 안 선생님, 상훈이와 함께 빵을 응용한 각종 요리로 저녁을 먹었다.    

  

  기미 상궁을 자처한 상훈이가 호기롭게 현지 하몽, 초리소, 살라미 등에 도전했지만 먹는 것마다 줄줄이 실패했다. 짜디짠 햄들의 습격에 연신 얼굴을 찌푸리며 괴로워하는 상훈이 덕에 모두가 웃었다. 감정을 감추는 방법 따위 애초부터 모른다는 듯이 그의 얼굴은 항상 놀란 표정, 실망한 표정, 궁금한 표정들로 가득했고 그것이 그의 주변까지 생기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청춘’의 특권이란 바로 이런 것. 그처럼 마음껏 놀라고, 실망하고, 궁금할 수 있다면 언제까지나 청춘일 수 있지 않을까. 


  함께 웃던 옆 테이블의 스페인 남자 산티아고 (이 사람은 이름 때문에라도 산티아고를 걸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여자 라우라와도 이때 친해졌다. 이탈리아 사람은 커피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차 마니아인 라우라가 나에게도 차를 권했다. 라디에이터 위에서 따끈따끈하게 말라가는 양말들처럼 내 마음도 따끈따끈 해지는 순간이었다.     


  모든 게 완벽했던 저녁에 찬물을 끼얹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다음날이 새해 첫날 휴일이라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장 본 음식을 나누고 꾸릴 때였다. 상훈이에게 초콜릿 반 개를 뚝 잘라 건네며 0.5유로를 받은 것이다. 여행지에서 저지른 나만의 흑역사가 몇 개 있는데 나보다 어린 동생에게 0.5유로를 받은 이 일도 그중 하나이다.      


  그런 상훈이가 바로 다음 날 내 순례길 여정을 통째로 흔드는 사건을 함께 겪으며 모든 걸 포기하려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 후로도 그가 과자며 요플레며 아낌없이 간식을 나누어 줄 때마다 첫날의 0.5유로 사건이 떠올라 내가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그저 해맑은 표정으로 “누나, 누나” 하며 따르던 상훈이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몇 년이 흐른 뒤 상훈이가 프랑스 어학연수를 간다고 했을 때, 혹시라도 먼 타지에서 유난히 외로운 날이 있거든 근사한 저녁 한 끼 사 먹으라고 50유로를 봉투에 넣어 건넸다. 0.5유로 마음의 빚을 100배로 갚고 싶었는데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후회스러운 흑역사로 남아있는 것을 보니 아직 빚 청산이 되지 않은 것 같다. 

     

  그때 상훈이가 나에게 베풀어준 것은 물질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이었다. 그렇기에 그 빚은 물질로 갚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살면서 나 역시 마음으로 갚아 나가야겠지.     


  이렇게 나에겐 남동생이 두 명이 되었다. 하나는 피로 맺어진 동생, 그리고 또 하나는 길로 맺어진 동생.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이 둘은 나이도 같고 ROTC 기수도 같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순례길이 끝난 상훈이는 귀국하자마자 바로 임관을 하였는데 심지어 내 동생과 같은 사단으로 배치되었고, 이 둘은 방까지 함께 쓰곤 했다!     


  잊지 말자!      

  이곳은 산티아고, 

  말도 안 되는 일이 말도 안 되게 일어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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