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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정 Dec 30. 2022

메세타, 두려움의 끝에서

  밤새 새해를 축하하는 인파의 환호성과 폭죽 소리에 잠을 설쳤다. 해외에서 처음 맞이하는 새해였지만 짐 꾸리고 간단히 아침을 먹고 출발하는 루틴이 여느 아침과 다르지 않기에 특별할 것도 없다고 느꼈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처음으로 판초를 꺼내 입고 라우라와 서로 사진을 찍어줄 때만 해도 나에게 오늘 어떤 일이 닥칠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특별할 것 없던 바로 그날이 내 생애 가장 특별한 새해 첫날이 되리라고는.     


  늘 일행보다 걷는 속도가 느려서 혼자 걷는 게 익숙해지던 차였다. 마을 벤치에 앉아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나니 본격적으로 구릉지대가 시작되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에 작은 마을도, 민가 한 채도 없이 길 하나만 이어진 그런 구간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던가. 나는 바로 이 구간이 메세타 고원의 시작인지도 몰랐다.      


  문제는 날씨였다. 비바람에 안개가 너무 심해 가시거리가 5m도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방향을 알려주는 노란색 화살표만 잘 따라가면 일행과 함께 묵기로 한 온타나스Hontanas가 나타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혼자 씩씩하게 걸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구릉뿐인 그곳에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다. 화살표도 드문 이곳에서 이 나무만이 유일한 지표가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타난 화살표가 우측을 가리키는데 왠지 내 촉은 직진 같았다. 그래도 화살표를 따라가는 게 맞을 것 같아서 일단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그 길을 따라 아무리 걸어도 더 이상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느낌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안개 때문에 방금 걸어온 길조차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지표처럼 느껴졌던 그 나무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마지막으로 본 화살표를 찾아 돌아가야 하나? 그래야 했다. 그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 기회를 저버리고 나는 좀 더 걸어보기로 했다.       


  한참을 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길을 따라 내려가니 갑자기 빨간 화살표가 나타나 언덕 위를 가리켰다. 빨간 화살표가 까미노 길을 가리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 언덕을 또 올랐다. 초조한 마음으로 힘들게 언덕을 오르니 이번엔 웬 무덤이 나타났다.     


  무서울 겨를도 없이 다시 뒤돌아 걸었다. 정말이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서 안경에 묻은 비를 연신 닦아가며 미친 듯이 걸었다. 약 3시간을 그렇게 배낭이 무거운지, 다리가 아픈지, 등산화에 얼마나 잔뜩 진흙이 달라붙어 있었는지도 모른 채 헤매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본능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때라는 느낌이 왔다.     


  ‘나는 왜 일행과 전화번호조차 주고받지 않았을까.’ 후회가 밀려왔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문자 메시지가 있었다. 


외교부에서 보내주는 긴급 상황 시 영사콜센터로 연락하라는 메시지였다. 긴급 상황이라면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하는 거겠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찾았다. 마드리드에 착륙하며 그 메시지를 보았을 때 내가 진짜로 그곳에 연락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연결된 곳은 서울이었고 콜센터 직원은 내 상황을 듣더니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다는 식이었다. 정말 그때는 어디 이 몸뚱이 하나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움막이라도 있으면 그 안에서 침낭을 덮고 밤을 새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어떻게 비를 맞으며 밤을 새운단 말인가.      


  대사관이라도 연결해달라는 나의 절박한 부탁에 콜센터 직원이 어찌어찌 마드리드 한국 대사관의 번호를 알려주었고, 그렇게 나는 대사님과 무려 새해 첫날부터 통화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무슨 생각으로 거길 혼자 걷고 있냐고 혼이라도 날 것 같아 통화가 연결되는 그 짧은 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이내 휴대폰 너머로 한석규, 이선균, 이서진을 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과 달리 대사님은 나에게 이름이 무엇이냐, 나이는 어떻게 되느냐, 춥지는 않으냐 물으시고, 체온 떨어지지 않게 일단 계속 걸으면서 우리 직원들과 연락을 꼭 유지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차분하고 따뜻한 음성에 나는 겨우겨우 멘탈을 붙잡을 수 있었다. 


  이어서 연결된 직원들은 어찌나 또 하나같이 친절하고 믿음직한지. (마드리드 대사관 직원 채용 기준은 목소리인가 잠시 생각했다.) 이분들은 심지어 나에게 곧 구조대를 보내겠다고 하셨다. 구조대라니? 무슨 헬기라도 뜨는 건가? 나중에 헬기 뜬 비용이라도 청구하면 어쩌나 싶어서 그 와중에 걱정이 되었다.     


  “저기 제가 너무 일을 크게 만드는 거 아닐까요. 저는 진짜 아까 그 길만 다시 찾으면 되는데 도저히 그 길을 다시 찾을 수가 없어요.”     


  울먹이며 횡설수설하는 나에게 그때 돌아온 답변. 10년이 지난 지금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다.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어떻게든 구조해 드릴 겁니다. 저희의 가장 큰 임무이자 책임은 대한민국 국민의 안전한 신변 보호입니다.”


  아, 내가 태어나서 25살이 되도록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이토록 자랑스러운 적이 있었던가. 2002년 월드컵 4강에 진출하던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자부심이 단전부터 끌어 올라왔다. 전 세계에 이보다 더 친절하고 프로페셔널한 대사관 직원들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마드리드에 도착하면 내 기필코 한국 대사관에 주스라도 사들고 인사드리러 가야지. 아니 외교부 홈페이지에 이들의 투철한 직업정신을 널리 널리 알리고 모범 공무원 표창이라도 받게 해드려야지.’      


  그분들 덕에 내가 죽지는 않겠다 싶었는지 그 와중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문제는 구조대를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 나의 위치를 도대체 나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길치가 기계치면 상황이 심각해지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당시 나는 출국 3일 전에 내 인생 첫 스마트폰을 사서 갔고 구글맵의 존재도 몰랐다. 요즘은 순례길 앱부터 출발 날짜별로 단톡방까지 있다고 하니 나처럼 조난이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을 것이다.)      


  날은 어두워지고 점점 더 추워지는데 워낙 시골이라 중간중간 휴대폰마저 터지지 않았다. 또다시 절망하며 걷던 그때 돌무더기에 꽂힌 팻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히 캄캄해지기 직전 그 팻말이 내 눈에 들어온 건 정말 기적이었다.

      


  대략 ‘사유지’라는 뜻의 팻말은 그동안 몇 개 보았는데 마지막으로 본 그 팻말에는 BU-000-000 라고 숫자도 몇 개 적혀 있었다. 그것이 내 위치를 알릴 수 있는 단서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채 일단 대사관 직원에게 알려주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했고 남은 것은 추위와 공포 속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너무 추워서 차라리 걷고 싶었지만 내 위치를 마지막으로 알린 곳이라 떠날 수도 없는 신세였다.    


  어느새 정말 해가 저물고 완전히 캄캄한 밤이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 멀리서 파란 불빛을 반짝이며 경찰차 세 대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그들이 날 발견할 리 없으니 내가 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요! Here!! Help me!!! Aquí!!!!!”     


  어디선가 주워들은 스페인어까지 동원하여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경찰차를 향해 달려갔다. 파란 불빛과 내가 어느 정도로 떨어져 있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나의 외침이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인가 싶다가도 이내 아득히 먼 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나의 간절한 외침을 듣지 못한 것인지 또다시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그때의 심정이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기 직전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와 있는 힘껏 붙잡고 매달렸는데 그 줄이 그만 툭. 내 눈앞에서 끊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이었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도 끊어진 것인지, 살려달라는 오만가지 외침의 끝을 거친 육두문자가 장식하고 말았다.     


  무슨 염치로 또 대사관 직원에게 전화를 거나 싶었다. 하지만 막상 위기 상황에 닥쳐보니 염치도 여유가 있고 선택지가 있어야 누릴 수 있는 감정이었다. 휴대폰 배터리마저 간당간당한 상황은 염치 같은 호사스러운 감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어렵게 대사관 직원과 통화가 연결되었을 때는 눈물이 줄줄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방금 경찰차가 빙글빙글 돌다가 간 곳 근처에 내가 있다고 말했다. 내 입으로 말을 하면서도 기가 막혔다. 경찰차가 빙글빙글 돌다 간 곳이 이 광활한 고원 속 어디 한두 곳일까. 그래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내 위치를 알릴 수 있는 헤드랜턴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다못해 호루라기라도. 아침마다 와인은 그렇게 열심히 챙겼으면서 정작 그런 것은 챙기지 못한 나 자신이 한심했다.  

    

  그렇게 또 한참을 기다리니 다시 저 멀리서 나타난 구원의 파란 불빛. 이번에는 나를 기다리겠다는 듯이 그 자리에서 라이트를 켠 채 계속 서 있었다. 아, 정말이지 그때부터는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 다시 저 경찰차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 동아줄마저 끊어지면 정말 끝이라는 생각으로 마지막 힘을 쥐어짜 달려갔다. 나에게 아직도 그런 힘이 남아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마침내 극적으로 만나게 된 경찰관은 나를 발견하시자마자 차에서 내려 달려오셨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오늘 하루 나를 지독하게 괴롭힌 것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비바람이 부는 추운 날씨도, 안개도, 두 발을 무겁게 하는 진흙도 아니었다. 바로 외로움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같이 겪을 ‘단 한 사람’이 내 곁에 없다는 것이 날 그토록 두렵게 만든 것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았다. 내 곁에 사람이 있으니까.


  차에 탄 뒤에도 계속 우는 나를 보며 경찰관은 계속 “hospital?”하고 물어보셨다. 일행이 기다릴 알베르게까지만 가면 된다고 했지만 당장이라도 나를 병원에 데려가실 기세였다. 내가 추울까 봐 히터도 최대로 틀어주시고 가는 내내 알 수 없는 스페인어로 나를 달래주셨다.     


  그런데 진짜 황당한 건 경찰차를 탄 지 1분도 안 되어 노란 화살표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구나 실감했다. 넋이 나간 채로 질질 울며 한 5분쯤 더 갔을까? 이번에는 웬 마을이 보였다. 설마 이 마을이 온타나스이면 나는 5분 거리에서 길을 잃고 새해 첫날부터 휴일 당직 중인 대사관 직원들과 경찰관을 총동원하여 민폐를 끼친 사람이 될 판이었다. 다행히(?) 그 마을이 온타나스는 아니었고 10분 정도 (실제로는 더 짧았는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믿겠다.) 더 간 끝에 드디어 온타나스에 도착했다.     

  경찰차를 타고 알베르게에 막 들어서는데 헤드랜턴을 켠 채 길을 나서는 안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알베르게에 경찰이 와서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갔다고 하셨다.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마을 어귀라도 돌아보시려고 나서시던 참에 내가 도착한 것이었다. 나라면 그 춥고 캄캄한 밤에 일행을 찾는다고 나설 수 있었을까? 다시 생각해도 마음이 찡해지는 순간이다.      


  무사히 알베르게에 도착했으면 이제 진정될 법도 한데 나는 무슨 일인지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경찰관이 사건 경위를 메모하고 가신 뒤 안 선생님과 둘만 남은 그 추운 알베르게 방에서 본격적으로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길을 잃었을 때는 우는 것도 사치였는데 이제 마음껏 울 수 있어 차라리 다행이었다. 순식간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안도감, 서러움, 슬픔, 공포감 등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휘몰아쳐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한쪽에서 아무 말 없이 내 등산화에 떡처럼 붙어있는 진흙을 다 털어내고 닦아주시는 안 선생님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아빠 생각이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빠 이야기는 전혀 모르던 안 선생님에게 밑도 끝도 없이 엉엉 울며 쏟아내듯 말했다.     


  “선생님, 우리 아빠도 그날 오늘 나처럼 무서웠을까요? 밤새 이 비를 맞아도 설마 죽지는 않겠지라는 확신이 있어도, 혼자인 그 순간엔 너무너무 무섭던데 겁도 많은 우리 아빠가 혼자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이렇게 영영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얼마나... 얼마나 사무치게 제가 보고 싶었을까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안 선생님은 그저 헛헛하게 웃으시며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에이. 오늘 날씨 정도로 죽지는 않지. 근데 죽을 만큼 고생은 했겠지.”


  나를 와락 안아주시거나 함께 슬퍼해 주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맞은편 침대에서 한 발 떨어져 평소와 다름없이 하신 그 투박한 말씀에 폭풍우같이 휘몰아치던 감정들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상훈이, 라우라, 산티아고는 저녁도 거른 나를 위해 그 야밤에 어디에선가 샌드위치와 따뜻한 우유를 구해왔다. 하루 종일 굶다시피 했지만 먹을 힘조차 없어 그저 울면서 생각했다. 이제 나는 그만 이 길을 접고 쉰 다음 스페인 관광이나 좀 하다 가야겠다고. 나는 이 길에 다시 설 자신이 없다고. 두 번 다시는 걷지 못하겠다고.     


  ‘고난 끝에 찾은 알베르게는 정말 따뜻했다.’가 자연스러운 전개인데 그곳도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온도는 바깥과 다를 바가 없었고 딱 비바람만 막아주는 수준이었다. 자연스럽게 벽난로 앞에 모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산티아고가 부지깽이들을 모아다가 열심히 모닥불을 피우고 라우라는 어제처럼 따뜻한 차를 건네줬다.      

  다들 오늘 나에게 무슨 일이 있기나 했냐는 듯이 우리가 부르고스에서 처음 만나 저녁을 먹던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호들갑 떨며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 그 분위기가 나의 온몸을 감싸며 위로해 주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비바람 피할 곳 하나 없던 고원 한가운데에서 혼자 밤을 꼴딱 새울 줄 알았다가 침대라는 곳에 몸을 누이고 나니 이곳이 천국인가 싶었다. 지독하게 추웠던 온타나스 알베르게가 나에겐 오성급 호텔이었고 삐걱거리는 싸구려 매트리스라도 그저 감사했다.      


  바로 기절해서 잘 것 같았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절대로 이 길을 다시 걷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는데 무엇인가 자꾸만 마음에 걸려 밤새 어떤 결정도 하지 못했다.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 선택이 무엇이든 나의 산티아고 순례는      

  아니 어쩌면 나의 인생은      

  그렇게 2012년 1월 1일, 

  그날의 메세타 조난 사건 전후로 나뉘게 되었다.               


p.s. 당시 마드리드 한국 대사님과 직원분들께 외교부 홈페이지에 ‘해외에서 겪은 미담 나누기’ 같은 게시판이 없어 못 올린 감사 인사를 뒤늦게나마 전합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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