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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정 May 11. 2023

산티아고, 라우라 1편

Santiago, Laura from Spain, Italy

  밤새 고민한 시간이 허무하게 대단한 결심이랄 것도 하지 못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내 앞에는 바로 전날처럼 친구들이 걷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누가 내 멱살을 잡고 강제로 다시 이 길에 끌어다 놓기라도 한 것일까?’     


  같이 걷던 친구가 전날 그 엄청난 일을 겪었으면 옆에 바짝 붙어 걸어줄 법도 한데, 친구들은 어제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별다를 것 없는 풍경 속으로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이게 서양식 우정인가 싶어 살짝 섭섭해졌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는 것을. 그리고 전날보다 훨씬 느린 걸음으로 알게 모르게 나를 챙기며 가고 있다는 것을. 그 친구들이 바로 나에게 찾아온 네 번째 기적, 산티아고와 라우라이다.     


  돌이켜보면 애초에 나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걸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걷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이들과 헤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자꾸만 뒤돌아보며 나를 확인하는 친구들, 뒤에서 따라가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가라는 안 선생님까지. 나는 도무지 이들과 헤어질 자신이 없었다.      


  여전히 전날 겪은 일을 떠올리면 소름이 쫙 끼쳤다. 일행보다 느리게 걸으면서도 지나온 길이 아쉬워 자주 뒤를 돌아보던 나였는데, 그러지도 못할 만큼 두려워서 앞만 보고 걸었다. 하지만 이들과 헤어져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는 것이 그보다 더 두려웠다. 그래서 걷고 또 걸었다. 갈팡질팡, 쿵쾅거리는 마음과 지칠 대로 지쳐 후들거리는 다리로.     


  전날 조난되면서 체력을 몇 배는 더 쓴 탓인지 걷는 게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여전히 마을도 바르도 없는 지긋지긋한 메세타 고원이었다. 숨이 꼴딱 넘어갈 때쯤 겨우 운동기구 몇 개가 있는 작은 놀이터가 나와 잠시 쉴 수 있었고, 그 후 오래된 성당과 폐허가 된 마을을 거쳐 드디어 알베르게가 나타났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도 잠시 보아디야Boadilla del Camino의 알베르게는 진짜! 역대급으로 추웠다. 군대 혹한기 훈련을 체험할 수 있다는 누군가 평이 과장이 아니었다. 남극의 이글루도 이만큼 춥지는 않을 거라며 우리는 바로 옆에 붙어있는 바르로 일단 피신했다. 그곳도 난방시설이라곤 매캐한 연기가 나오는 오래된 나무 난로 하나뿐인 곳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오더니 서로의 온기로 그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사람이라고는 살 것 같지 않은 폐허 같은 마을로 보였는데 어디서 살고 있다가 나타난 것인지 신기할 정도로 꽤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이들에겐 일과를 마치고 이곳에 모이는 게 당연한 일상인 듯 보였다.      


  천장에 매달린 오래된 티비에서 스페인 드라마가 나오고, 마을 사람들은 매일 만나는 사이인데도 무슨 할 말들이 그렇게 많은지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배 나온 할아버지들은 바에 기대어 술을 한 잔씩 홀짝였고, 젊은 부부는 어린 딸의 애교를 보며 행복해했다. 스페인에 관광을 왔다면 결코 알지도 못했을 이름 없는 시골 마을의 허름한 바르. 하지만 내가 이보다 더 그들의 삶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는 나의 다국적 동행들이 다들 비슷한 수준의 생존 영어 실력으로 카드 게임을 하며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나마도 영어가 안 통할 땐 그냥 각자의 모국어로 말하는데 손짓, 발짓에 몸짓까지 총동원하여 떠들면 스페인어, 한국어, 이탈리아어가 소통이 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어쩌면 소통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언어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간절함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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