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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정 Jun 12. 2023

김민정 1편

Kim minjeong from South Korea

  오로지 친구들의 반강제 멱살잡이의 힘으로 까리온Carrión de los Condes에 도착했다. 알베르게에 들어서는데 한국인 한 명이 계단에서 내려오며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 역시 반갑게 인사해야 하는데 너무 지친 상태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짐부터 풀었다.      


  까리온 알베르게는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독특한 분위기의 알베르게였다. 지금까지 내내 철제로 된 이층 침대만 보다가 원목 느낌의 일층 침대를 보니 가정집 같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 함께 안 선생님의 카레에 포도주를 곁들여 마지막 만찬을 함께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분 역시 나처럼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라 내일 버스를 타고 레온까지 갈 계획이라고 했다. 세상에! 인사가 아니라 큰절을 하고 옆에 달라붙어야 할 판이었다. 통성명하고 갑자기 언니라 부르며 친한 척을 했다. 그러고 나서 제발 나도 함께 데리고 가달라며 사정을 했다. 이 언니가 바로 나에게 찾아온 다섯 번째 기적, 민정 언니다.     


  언니는 내가 메세타에서 길을 잃은 바로 전날 그 구간을 걸었다고 했다. 나와 달리 언니에게는 그 구간이 최고의 구간이었다. 날씨가 환상적이어서 중간중간 풀밭에 드러눕기도 하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며 내가 겪은 일을 안타까워했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길도 마찬가지 아닐까? 누군가에겐 최고의 순간이 누군가에겐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순간일 수도 있다. 내가 따뜻한 햇볕 아래 산들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다면, 혹시 그 순간 나와 멀지 않은 곳에서 비바람과 안개 속에 헤매고 있는 이는 없는지 잠깐이라도 살펴볼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아무 대책도 없이 첫날엔 히치하이킹, 메세타에선 경찰차로 이동한 나와는 달리 언니는 생존 스페인어를 적어 코팅해서 들고 다니는 꼼꼼한 사람이었다. 까리온에서 버스를 타려면 근처 바르 주인에게 표를 끊고, 정거장 표시 따위는 없는 곳에서 버스를 타며, 그마저도 하루 한 대 출발하는 버스가 유일하다는 사실을 언니를 만나지 못했다면 과연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올라코, 안 선생님, 상훈이, 라우라, 산티아고에 이어 이번에는 민정 언니가 나의 멱살을 잡듯 끌고 갔다. 이 모든 게 사실 다 계획된 일이라는 듯이 딱 그 타이밍에, 딱 그곳에 나타나서 말이다.     


  언니가 걸어온 이야기를 들으며 2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레온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대도시는 언제나처럼 나를 설레게 했다. 레온 대성당은 예뻤고 그 앞에서 놀고 있는 동네 꼬맹이들과 인형 같은 쌍둥이는 더 예뻤다.


 


  아이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놀다가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한 식당에 들어갔다. 큰마음 먹고 10유로짜리 오늘의 메뉴를 시켰더니 무뚝뚝한 주인아저씨가 별말씀도 없이 달랑 콩 스프, 하몽, 빵만 주는 것이었다. ‘설마 이 하몽 몇 조각이 메인 메뉴인 거예요? 정말이요?’ 최대한 불안한 표정과 간절한 눈빛으로 주방 쪽에 있는 아저씨를 아무리 바라봐도 당최 반응이 없으셨다.     


  ‘그래 이게 10유로 인가 보다. 레온 입성 기념 신고식 제대로다.’ 하고 포기할 때쯤이었다. 아저씨가 ‘옜다, 오다 주웠다.’ 느낌으로 소고기 스테이크를 가져다 우리 앞에 턱 놓으시는 게 아닌가. 아니, 아저씨. 메뉴 더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한번 씨익 웃어주셨으면 우리도 안심하고 얼마나 좋아요. 가게가 위치는 너무 좋은데 주인아저씨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영 틀렸다며 언니와 한참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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