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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정 Jun 22. 2023

김민정 2편

Kim minjeong from South Korea

  잠시나마 관광객 모드로 행복했던 전날의 기억을 뒤로하고 다음날 우리는 산마르틴San Martín del Camino까지 함께 걸었다. 문제는 물집이 발바닥의 절반 이상을 장악해버린 언니의 발 상태였다. 산마르틴에 도착할 즈음 노을이 붉게 타고 있었는데 언니는 그 노을이 지옥불이 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했다.    

 

  다음날 언니는 병원을 찾았고 의사는 언니에게 순례길을 당장 중단하라는 선고를 내렸다. 의사가 아니라 누가 봐도 그 발로 걷는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메세타 조난 사건에도 다시 길 위에 섰던 나처럼 언니 역시 이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영화 <실미도>에는 부상으로 더 이상 훈련에 참가할 수 없게 되자 취사병으로 제 몫을 다하는 병사가 나온다. 부상병이 된 언니는 그 후 며칠간 다음 알베르게까지 버스로 조금씩 이동할 수밖에 없었지만 취사병을 자처하며 언니만의 순례를 이어갔다.


  아무리 혼자 가는 길이 외로워도 다음 알베르게에서 기다리는 언니를 생각하면 (정확히는 언니가 해줄 밥을 생각하면) 젖 먹던 힘까지 짜내게 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언니의 멱살을 잡고 끌어줄 차례인데 이렇게 또 언니가 내 멱살을 잡고 끌어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때로는 떨어져 있었지만 언제나 함께인 채로 산티아고까지 함께 입성했다. 그리고 추운 겨울밤 산티아고 성당을 바라보며 차디찬 돌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곳이 산티아고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언니였기에 털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초동안의 소유자라 나와 친구로 보이지만) 언니는 나보다 10살 위였다. 1유로도 되지 않는 요리용 싸구려 팩 와인을 물통에 넣고 다니며 마시던 25살 나에게 그때 언니는 가끔 식당에서 와인 한 병을 주문해 같이 마시자고 하는 한없이 크고 멋진 어른이었다. (와인을 병으로 시키면 다 어른이다.)     


  어느덧 우리가 만난 지 딱 10년이 흘렀으니 벌써 내가 그때 언니의 나이가 되었다. 언니처럼 35살이 되어보니 이제 와인을 병으로 주문하는 것은 나에게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건 어렵지 않은데, 문제는 여전히 인생에는 어려운 고비가 참 많고 풀리지 않는 고민도 많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렇기에 35살 그때의 언니도 그 길에 와서 답을 구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내 곁에는 든든한 언니가 있다. 힘들 땐 언제라도 언니에게 왜 인생에는 까미노의 화살표가 없는지 투정할 수 있고, 사골 우려먹듯 10년째 우려먹는 그때의 에피소드들로 함께 울고 웃으며 밤을 새울 수도 있다.      


  그런 언니가 여전히, 고맙게도 내 곁에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길이 두렵지만은 않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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