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tiago, Laura from Spain, Italy
잠시나마 추위를 피할 수 있던 바르도 문을 닫자 우리는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소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자야 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먼저 샤워실로 들어간 라우라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오며 나를 말리듯 말했다.
“그나마 샤워기에서 미지근한 물이 나와. 그런데 샤워실이 너무 추워서 그 물이 어깨에 닿을 때는 얼음처럼 찬물로 변해있어!”
나는 희미한 미소로 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 라우라. 나는 애초부터 샤워할 생각 따위 안 했어.’
한편 산티아고는 은박지처럼 바스락거리는 방한용 비닐을 꺼내 보여주었다. 하도 진지해서 비장의 무기라도 꺼내는 줄 알았다. 상훈이는 그 비닐 커버에 있는 모델처럼 괴로운 표정을 짓고 덜덜 떠는 흉내를 냈다. 우린 언제쯤 ‘Tengo frío(추워요!)’를 외치지 않는 알베르게를 만나게 되는 거냐면서. 내가 이 불쌍한 이방인 두 명은 끝내 ‘따뜻한’에 해당하는 스페인어는 외우지 못한 채 떠날 것이라고 하니 산티아고와 라우라가 빵 터졌다. 그렇게 이들과 함께여서 사막에서 꽃이 피듯 그 황량한 고원에서도 웃음꽃이 피어났다.
다음 날 아침 산티아고의 표정을 보니 역시나 그 정체불명의 은박지는 별 도움이 안 된 듯했다. 하지만 진저리치게 추운 알베르게 덕분에 우리 다섯에겐 함께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끈끈한 동지애가 생겼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의기투합하여 2층 침대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출발 전 단체 사진을 찍었다. 이 지독한 알베르게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듯이. 이글루에서 생존하고 난 뒤 찍은 사진에서는 어느덧 가족사진 느낌이 났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기꺼이 가족이 되었다.
여느 때처럼 출발했다. 아픈 발목과 여전히 반쯤 나가 돌아오지 않는 멘탈이 나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이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걷는 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침에 들른 바르에서 내가 친구들 것까지 계산했다. 상훈이에게 0.5유로를 챙겨 받던 내가 메세타 고원에서 회개하고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른 바르에서는 산티아고가 우리가 먹은 몫까지 계산했다. 서양인들은 더치페이만 하는 깍쟁이들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다들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나누지 못해 안달인 모습이었다.
너무나도 먼 곳에서, 너무나도 다른 문화 속에 각자 다른 시간을 살아왔지만 그 길에서 함께한다는 이유로 한순간에 가족이 되었던 이들. 이들 덕분에 순례길에서 나의 편견은 여러 번 깨지고 또 깨졌다. 그렇게 편견이라는 우물에 갇혀 있던 개구리는 세상을 향해 나왔고 걸으면서 배웠다.
더 넓은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더 나은 삶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