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의 햇살이 눈이 부시다. 오늘로 병원생활 십 일째이다. 평생처음으로 간병인으로 병원에 입소하였다. 그렇다고 내가 전문 간병인이라는 직업인으로 병원에 온 것은 아니고 잠시 일을 쉬고 있는 내가 어머니의 간병인으로 자청하였다. 누님과 집사람은 그냥 전문 간병인에게 간병하게 하자 했지만 왠지 내가 해야 할 것 같아 내가 한다고 고집했다.
오늘 아침 회진하는 의사선생님이 호흡도 편하고 맥박도 안정되었다고 하면서 오늘밤까지 평안하시면 내일은 퇴원하라고 하신다. 창밖의 아침 햇살이 어머님의 회복을 알려 주는 메신저였나 보다.
어머니는 다음날 퇴원하여 요양원으로 옮겼지만 그날 밤을 못넘기고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치매로 판정 받은 것은 벌써 십오 년이 넘었다. 처음 진단 후 믿기지 않고 믿을 수도 없어 오진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나 자신을 부정했다.
당시 의료 관련일을 하던 두 분 누님은 당시 어머니의 행동을 보고 치매 초기라며 빨리 병원진단을 받아 보자고 했지만 내가 이런 저런 핑계로 가지 않아 누님이 집사람과 같이 S대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몇 번의 검사 끝에 최종적으로 알츠하이머성 치매로 진단을 받았다. 이때에도 나는 의사도 오진을 할 수 있다며 그 결과를 받아 들이지 못했다.
이후에 은병병원, 서북 병원등에서 입원 치료 후 몇 군데의 요양원을 거쳐 서초동에 있는 구립서초요양원에서 십여년을 계셨는데 큰누님은 집근처라고, 작은 누님은 직장이 근처라고, 나는 장남이라고 수시로 방문하였고, 이러한 행동으로 나는 효도를 다 한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자기 만족에 안심하였던 것 같다.
내가 어릴적 기억도 없지만 어머니가 가끔 하셨던 이야기 중 하나가 너는 어려서 경기가 심해 까물어 치면 너를 업고 남영동 소아과 병원까지 뛰어 갔고 병원에 가면 멀쩡하게 깨어나서 걸어서 돌아왔는데 내가 너를 업고 가는 동안에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웃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자 어머니의 그 말씀속에 어떤 마음이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늦었지만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마음은 어떠하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결혼 후 몇 년간 집사람과 같이 벌면서 경제적인 여유를 갖고 내 생애 처음으로 승용차를 사고 자가용족으로 등극했을 적에 어쩌다가 내가 쉬는 날이면 아버지는 애들 데리고 바람 쏘이러 다녀오란 말을 하지만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거절하였다. 집사람은 나에게 아버님이 가족들과 함께 외출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눈치 없이 거절한다고 타박하였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께 같이 가자고 하면 안간다고 하시면서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먼저 준비하고 차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계셨고, 집사람은 맘이 급해져서 본인 치장은 뒤로 하고 애들 씻기고 옷입히느라 분주해진다.
내가 차를 처음으로 산 그 해 가을에 아버님을 모시고 시제에 참석했다. 해방되던 해에 평안북도 정주에서 걸어서 서울까지 피난 오신 아버지는 면민회나 군민회 혹은 시제 등의 행사에는 꼭 참석하셨고 나도 따라서 몇 번 참석 하였지만 모이면 어르신들은 고향이야기와 고향에서 떠나와 어렵게 살던 이야기에 끝이 없지만 육이오 이후 태어난 우리 세대는 이해 안되는 동화 속의 이야기 일뿐이라 재미 없고 지루하기만 하여 참석 할 수 없는 핑계를 만들어 되도록 참석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바람도 쏘일겸 부모님과 집사람 그리고 애들까지 모두 같이 한차에 타고 홍천의 시제를 참석하러 갔다. 도착하자마자 아버님과 어머님은 인사하고 인사 받기에 빠뻣지만 우리는 한쪽구석에서 뻘줌하게 서서 애들 돌보는 척하면서 서 있었다.
갑자기 문중 어르신 한 분이 음식을 준비하던 아주머니들이 모여 있던 곳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면서 경건하게 모셔야할 음식을 준비하면서 웃고 떠든다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고 나는 연안김씨 문중에서도 장파 17대 장손이지만 항렬이 낮아 음식을 차려주면 나르는 일만 하다가 갑작스런 호통에 어쩔 줄을 몰라 내가 뭔 실수를 했나 하고 뻘 줌하게 서 있었다. 그때 나이든 할머니 한 분이 ‘에구 또 시작이야 어련히 알아서 하는 걸! 저리 큰 소리치나?’ 연안김씨 남자들은 어쩔 수 없어‘ 하시는 말에 모여 일하던 아주머니들이 킥킥 거리며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그 옆에서 같이 음식을 준비하던 어머니도 거들면서 ’우리가 연안김씨한테 시집온걸 어쩌겠수’하는 말에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 조금 충격이었다.
집사람은 나를 보고 ‘연안김씨 고집’을 버리라는 말을 하고 나는 나이 들수록 그런 것을 유지해야 하며 바뀌는 순간은 인생이 초라해 진다고 못바꾼다고 가끔 다투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지난 일을 돌아 볼 기회가 생길때마다 내가 고집부려 안 된 일이 뭐가 있고 잘 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잘 된 일은 별로 없고 후회되는 일만 가득하다. 그래도 하나 있다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간병을 내가 했다는 것이고, 그것도 전문 간병인을 하는 것이 어머니가 더 편안하실거라 했지만 어설퍼도 아들이 수발드는 것이 어머니 맘이 더 편안할 거라고 우겨서 했지만 내 고집으로 아니 연안 김씨의 고집으로 어머니의 마지막 간병을 했다는 것에 어머니도 마지막까지 아들의 노력을 인정했으리라 혼자 생각하고, 혼자 만족하고, 혼자 흐믓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