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와 어머니

by 김성철

봄이다. 아니 여름이다. 아니 달력은 봄인데 날씨는 여름이다. 아침 일기예보에서 푸른색 반팔 원피스를 입은 멋진 아나운서가 오늘 날씨가 올해 들어 가장 높은 온도를 기록할 것이고 미세먼지도 보통으로 야외 활동하기 좋은 날씨라는 말을 듣는 순간 불현 듯 20여 년 전에 어머님을 모시고 당진으로 갔던 일이 생각 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머니는 알츠하이머성 치매로 오랜 시간 요양원 생활을 하시다가 병이 심해진 이후에는 거동도 못하시고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고 10여 년을 병상에 누워 계시다가 2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군인데 815해방과 동시에 소련군이 점령하므로 견디지 못하고 식구들을 이끌고 삼팔선을 넘어 서울로 피난 오셨다. 당시 고향에서 반동 가족으로 몰려 모든 재산을 고향에 두고 가족들과 함께 겨우 남쪽으로 넘어왔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어쩌다 술이라도 한잔하시면 “내가 고향 떠나올 때 본채 기와 밑에 땅문서를 두고 왔는데 내가 살아서 고향가긴 틀렸고, 네가 통일되면 잊지 말고 꼭 가서 찾아라,”고 신신당부 하셨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고생을 모르고 자라신 아버지의 생활력은 별로였다. 가족을 위해 뭔가를 열심히 하시지만 결과는 항시 좋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머니가 억척같이 고생하셔서 집안을 이끌어 나갔다. 청파동 기름집부터 남영동 굴다리밑 식당까지, 기름집 기술자에서 주방 찬모까지, 모두 어머님이 고생 하셔서 운영하셨고 아버님은 카운터에 앉아서 돈을 받거나 혼자 온 손님이 있으면 마주 앉아 반주를 기울이는 등 어린 내 눈에는 가게 운영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내가 사지 멀쩡한데 왜 너희와 같이 사느냐. 내가 따로 살아야 네 처도 편한 거다.”하시며 효창동 집으로 이사하셨다.

그 집은 삼십여 년 전 효창동 일대가 재건축 붐이 불어 우리 집도 재건축하여야 했고 당시 경제력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아버님이 공사 감독을 겸하면서 가진 돈에 맞게 지은 집이라 생활하는 효율성은 많이 떨어지는 상태였다. 그래도 나름대로 편히 사실수 있게 이층에 입식 부엌을 만들고 화장실을 개조하는 등 조금이나마 편하게 하여 이사 시켜 드렸다. 그때 다니시던 교회 근처로 가야겠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아버님이 지으신 집이라서 정 때문에 가신 듯하다.

어머님이 분가하신 이후 우리 식구들뿐만 아니라 두 분 누님도 주말이면 돌아가면서 어머님 댁을 방문하여 같이 외출하거나 외식하는 것이 우리 집안의 주말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일이 년 지나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떤때는 과일이나 고기를 사드리고 오면 다음 주에 가도 그대로 있고, 어떤 때는 밥솥마다 밥을 해 놓으셨는데 어떤 솥은 파랗게 곰팡이가 생길 정도로 그냥 놔 두었던 것도 있었다. 왜 안드시고 놔 두었냐고 물어 보면 앞집 아줌마와 같이 먹어서 그렇다는 등 교회에서 누가 밥 사줘서 안 먹었다는 등 천연덕스럽게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한달에 몇 번씩 방문하면 집사람은 부엌에 들어가서 설거지와 냉장고 청소를 비롯하여 대청소를 하는 것이 일과였다. 어느날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어머니 혹시 치매 오신 거 아냐? 병원 가서 검사받아 보는 것이 어때요?”라며 은근하게 나를 독촉였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치매라는 판정을 받을까봐서 두려움에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무시하고 그런말 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그날은 오늘같이 날이 맑고 쾌청하여 야외로 나가기로 하고 어디를 갈까 생각 하다가 작년에 아들과 낚시를 갔다가 들렀던 자연산 우럭을 전문으로 하는 당진의 음식점이 생각 나서 식구가 모두 같이 가기로 하였다.

아침 일찍 안양에서 출발하여 효창동에 가서 어머님을 모시고 서해안 고속를 타고 당진으로 향하기로 하였으나 아내는 고속도로보다는 국도로 가는 것이 창밖의 풍경도 보고 어머니께 정서적으로도 더 좋을 것 같다고 하였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운전만 신경쓴다면 시골 풍경을 보면서 천천히 가는 것이 더 좋을 듯하여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된지 몇 년이 지났으므로 수원에서 발안을 거쳐 당진으로 가는 구도로는 차도 없고 한가하여 창밖의 풍경을 보기가 매우 좋았다.

국도에서 지방도로로 접어들자 양옆에는 드문드문 시골집들이 나타났고 집옆에 커다른 나무가 있는 집이 보였다. 이 집을 보시자 어머니는 “내가 어릴적에 우리 집 뒤에 커다란 밤나무가 있었는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밤새 떨어진 밤을 주워 오거나 네 외삼춘이 나무에 올라가 흔들면 내가 치마를 넓게 벌리면 밤이 거기 떨어져 치마 가득 주워서 가져오고 그럼 네 할머니가 여자애가 치마 벌리고 다닌다고 혼내고 그랬지”하시는 것이었다. 아마 창밖의 풍경에 옛날일이 생각나시는 듯 했다.

그러고 일이 분 쯤 지났을 무렵에 어머니는 다시 “내가 어릴적에....”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다시 처음부터 똑같이 반복하시는 것이었다.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하는 것이 마치 연극배우가 대사를 외운 듯 하였고 아내는 이것이 치매라는 것을 알라는 듯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모르는 척 그냥 어머니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운전에 집중하였다.

옆에 앉아 있던 당시 초등학교 다니던 딸아이가 “할머니, 아까 그얘기 했잖아. 벌써 몇 번째 하는거야? 내가 다 외겠네.”하자 할머니는 멋쩍은듯 “그래? 내가 했어? 밖을 보니까 자꾸 생각나네.”하시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분도 지나기전에 또 다시 창밖을 보시던 어머니는 다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시고 우리는 아무도 대꾸하지 않고 서로 조용히 얼굴만 쳐다 보았다.

당진에 다녀온 후 어머니는 서울대 병원 정신과에서 치매전문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고,검사 결과는 알츠하이머성 치매이며 더 심해지기 전에 입원하여 치료받아 보라는 의사의 권유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서북병원에 입원하셨다. 이후 우리 가족들의 주말 문화는 효창동 어머니집 방문에서 서북병원 면회로 바뀌었다.하지만 나의 가슴속에는 그때까지만 해도 의사의 오진일 거라는 생각을 포기할 수 없고 “퇴원하면 괘찮을거야”라는 믿음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입원후 한달쯤 지나서 면회를 갔는데 마침 면회시간이 점심시간이라 외출을 허가 받고 어머니를 모시고 근처의 유명한 맛집인 돌솥 설렁탕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돌솥에 있는 햐얀 쌀밥을 먼저 설렁탕 그릇에 몇 수저 담으신 후 돌솥에 물을 붓고 식사를 시작했다. 몇 수저 뜨신 후에 갑자기 어머니는 이상하다는 듯이 “누가 내 밥에 물 말아 놨어?”하시고는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자 아무일 없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내가 물 말은 밥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하시고는 돌솥을 얼른 당겨서 식사를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황당하여 어쩔줄을 모르다가 그냥 “엄마 틀니 안가져 온거 같아서 물에 말아놨어.”하고 대충 넘어 갔지만 가슴 속으로는 먹먹함과 답답함이 치밀어 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도 젊었을적에는 억척함과 똘똘함으로 동네에서 알아주었는데 이제 나이들어 치매에 걸려서 금방 자기가 한 행동도 잊어버리고 천연덕스럽게 아무일도 아닌 듯 하는 행동을 내가 직접 보고 느끼니 치매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다시 한번 인식했고 전부터 집사람이 일찍 병원에 모시고 가서 진찰받아 보자고 했을 때 설마 설마 하고 부정했던 것이 후회스럽기만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벌써 2년 가까이 되었다. 다음 주에는 꼭 산소에 가서 잡초도 뽑고 잘 계시는지? 아버지 곁에서 고생은 안 하시는지 안부라도 묻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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