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Success is not final. Failure is not fatal. It is the courage to continue that counts." (Winston Churchill)
몇 번의 봄이 지나고, 그날이 내게도 찾아왔다.
오래전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응답하라 시리즈가 유행했다..
보다보면 옛 생각도 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서
가족들이 모여 즐겨보았다.
응답하라 1988.
주인공인 정환, 선우, 덕선이, 도룡용은 모두 1971년생이다.
나와 같은 나이라서 감정이입이 더 잘 되었던 것 같다.
한 번은 돼지띠가 사상 최고의 경쟁률로 학력고사를 본다며 에피소드가 나왔는데
눈 펑펑 내리던 1990년 겨울이 떠올랐다.
시험이 끝나고 미술부 친구들과 함께 걸었던 눈 수북히 쌓인 덕수궁 돌담길과
테입을 선물 받아 난생처음 들었던 조지윈스턴의 피아노곡이 떠올랐다.
정말 까마득한 일인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19화는 『당신은 최선을 다했다』편이다.
늦은 겨울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걱정된 덕선이 엄마가 대문을 열고 나갔는데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집 앞 툇마루에 앉아 있던 성동일 과장을 발견했다.
"당신, 와이라고 앉아있노? 와? 뭔 일 있나?"
"임자... 나 오늘... 명예퇴직 당했네."
"..."
"미안하네..."
"아이다 여보... 당신이 뭐가 미안하노? 당신... 미안할 거 한 개도 없다."
덤덤하게 말하는 성동일 과장에게 내 모습이 투영되어 보였다.
언젠가 다가올 내 겨울의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함께 보고 있던 태성이가 눈시울이 붉어진 내게 물었다.
"아빠는 언제까지 일 할 거예요?"
"글쎄... 아빠도 지금 회사에서는 오래도록 일 할 수 없을지도 몰라. 몇 년이나 남았을까?"
"그럼 그다음엔 뭐 하실 거예요?"
"글쎄... 이제부터 천천히 고민해 봐야지."
"이케아에서 일하면 안 돼요?"
"왜? 이케아가 좋아 보이니? ㅎㅎㅎ"
"네. 거기 좋잖아요.ㅎㅎㅎ"
"근데 거기도 나이가 많아지면 일을 그만둬야 할 거야 아마."
"아... 그럼 어떻게 해요?"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거, 그래서 할아버지가 돼도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야지.
그러니 너희들도 나중에 커서 뭐 되려고 하지 말고..."
"아, 알아요. 나중에 커서 다른 사장님 밑으로 취직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걸 찾아서 그냥 하라고..."
"그래. 우리 아들 잘 기억했네. ㅎㅎ
그게 뭐라도 좋으니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알려줘. 아빠가 도와줄게. 알았지?"
"네, 아빠..."
"시간이 흘러 너희들이 입시경쟁에 내몰렸을 때도 이 대화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아빠는 너희들의 삶이 큰 파도에 떠내려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길 바래.
니 삶의 주인은 너다. 너 자신의 삶을 살아. 아빠가 늘 뒤에서 바라봐줄게.
너희는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1학년, 3학년이야... ㅎㅎㅎ"
어느새 이제,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이던 아이들은 커서 고등학교 1학년, 3학년이 되었다.
명예퇴직은 아니지만 나도 성동일 과장과 같이 새로운 시작을 할 때가 되었다.
막연하던 그 미래가 지금이 된 것이다.
나이 60에 정년퇴직.
퇴직금으로 10년 남짓만 더 살면 되던 시절.
한때 대기업은 참으로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평생직장...
하지만
40대 말, 50대 초에 퇴직을 고민하고
퇴직금으로 40년 이상을 버텨야 하는 시대.
대기업의 시스템 속에서 한 분야의 전문가로 살아온 사람이
시스템을 떠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여전히 '안정적'일까?
'안정적'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변했고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장은 좀 '불안정' 하더라도
나머지 40년을 '안정'시켜 줄 수 있는 뭔가의 대책.
미래의 일이 아니다.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미 닥친 일이다.
PS.
어린 두 아들에게, 원하는 건 뭐든 해도 좋은데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할 생각만은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다.
임자, 화무십일홍이라고 들어봤는가?
국화꽃도 한철이고
열흘 버티는 꽃 없다고
이제 뭘 좀 해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사치인가 보네.
세월이 어디 우리한테만 가나.
남들도 다 간다.
어따대고 하소연 하겠노.
그러려니 하는 거제
내 오늘 참말로 큰 거 하나 깨달았네.
꽃 잎이 지면 다 끝난 줄 알았어.
근데 그 꽃잎이 지고 나면
또 열매가 맺히더라고.
내 꽃잎만 진다고
서럽고 아쉬워만 했지
그걸 못 봤네
- 응답하라 1988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