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mmy Park Apr 29. 2024

034 스스로 해야 진짜다

Jailbreak

"Leadership is about empowering others to achieve things they did not think possible." (Simon Sinek)


내가 믿는 걸 해내는 것만큼 신나는 일은 없다.


글로비스에서 미래사업추진센터장을 하던 당시의 일이다.

그 당시 신사업 본부를 따로 만들고 본부 산하에 여러 개의 실들을 두었는데

나는 본부장님을 보좌하여 신사업 전반에 대한 지원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다른 실들은 실장들 주관으로 운영되어 문제가 없었는데

본부 산하의 공통조직이었던 연구소가 연중에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사장님의 총애를 받던 연구소장이 있었는데
봄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회사를 퇴사하겠다고 사표를 던진 것이었다.

임원이 연말에 교체되는 것은 매년 있는 일이었지만

연중에 스스로 사표를 내고 나가는 건 글로비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어서

주변 사람들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갑작스러운 공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본부장님이 연구소장 겸임을 하게 되었는데
본부 전체와 함께 연구소 과제 하나하나를 챙기는 것은 무리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연구소 분위기는 점점 나빠졌고
이어서 연구소 내 핵심 팀장 두 명이 동시에 사표를 내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정말 막막한 상황이었다.

사장님 호출이 있었다.
신사업본부장님과 지원본부장님 그리고 내가 사장님 방으로 불려 갔다.
연구소장도 그렇고 팀장들이 이렇게 될 때까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냐며
사장님이 그렇게 큰 소리로 노발대발하시는 것은 그날 처음 봤다.
한바탕 질책이 있으신 후 그날의 의사결정은 내게 연구소장을 겸임하라는 것이었다.

부담스러웠지만 무조건 "네"라고 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민을 해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본부장님도 연구소 팀장들과 주간회의도 하시고
틈틈이 시간을 쪼개 과제들 리뷰도 하시는 걸 봤는데
내가 한다고 과연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똑같이 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고민 끝에 다음 날, 본부장님 방에 가서 말씀드렸다.

"본부장님, 어제 지시받고 계속 고민을 해봤는데 답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 자리를 일단 24층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멤버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해답을 함께 찾아나가야 할 것 같아요.
여기 25층은 실장들이 역할을 하고 있으니 가끔 점검만 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쉽지는 않을 거야. 걱정이다 나도..."
"일단 가서 최선을 다해 소통해 보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그런데 본부장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뭔데? 말해 봐."
"저 회의 좀 빼주십시오. 지금 제가 참석하는 회의가 너무 많습니다.
가서 한 명 한 명 면담을 해보려고 하는데
지금처럼 모든 회의에 다 들어가서는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아서요.

그게 끝날 때까지는 회의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일단 연구소에 집중해 봐."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날 오후에 난 24층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내려가자마자 멤버 전원에게 인사 이메일을 보내고는
기획팀에 멤버 리스트와 사진을 프린트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루에 2~3명씩 면담 일정을 잡아 공지하고 1 on 1 면담을 시작했다.
아침마다 출근해서 간단한 이메일 등을 처리하고는 하루 종일 면담만 했다.
처음엔 무엇을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몰랐지만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 명 한 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엇을 불안해하고 있는지...
현재 연구소의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뭐든지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 싶은지...
말 문이 트인 멤버들은 주옥같은 말들을 쏟아 냈다.
쉬지 않고 3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눈 멤버들도 있었다.

그런데 듣다 보니 좀 특이한 걸 세 가지 발견했다.
첫째는 다른 팀이 뭘 하는지 관심도 없고 서로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팀에 대한 소속감은 있었지만 연구소라는 소속감은 거의 없었다.
둘째, 연구소라고 하기에는 최신 기술에 대한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기술 연구소라기보다는 산업분석이나 컨설팅 중심의 경제연구원 같은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는 퇴사하는 팀장 두 명이 요주의 인물이라고 찍어 준 친구들이
오히려 더 애사심이 있고 연구소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친구들은 나름대로 회사와 조직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있었는데
조직장들과 소통이 안되서 계속 부딪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모든 멤버들과의 면담이 끝나갈 무렵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멤버들이 스스로 참여해서 개선 방안을 만들게 해야겠다.
그리고 서로 섞여 연구소라는 공동체의식을 만들어 줘야겠다.   

그래서 고민 끝에 TFT를 구성하기로 했다.
일명 '연구소 개선방안 도출 TFT.'
 
각 팀별로 1명씩을 차출하여 일단 회의실 한 방에 물리적으로 모았다.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를 장려하던 시기였던지라
한 방에 사람들을 모여 앉게 하는 게 맞는지 챌린지가 여기저기서 나왔지만  

그 외의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난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분위기를 좋게 하기 위해 방에 간식들을 직접 사 와서 넣어 주고

매일 퇴근 전 그 방에 들러 혹시 어려운 점은 없는지 묻는 게 다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방 안에서 그들이 머리를 모아 뭔가 만들어 내길 바랐다.

어느 날, 방에 들렀더니 생각의 정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아서
보고 자료는 어떻게 정리하는 게 좋은지,
어떻게 하면 내 논리가 더 설득적으로 보이는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진도가 급속도로 빠지는 것 같았다.


아이디어를 발산하다 보니 Radical 한 아이디어들도 나왔다.

가령 연구소 이름도 바꾸자든지, 조직장도 바꾸자든지,
아예 연구소에 무엇을 기대하는지 사장님께 직접 물어보자든지...

하지만 어디까지 가능한 건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 순간 리더로서 내 역할은 '해도 된다'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필요하면 조직 이름도 여러분들이 직접 바꾸어도 된다.

필요하면 조직장도 여러분들이 바꿀 수 있다.

필요하면 사장님과도 직접 소통하고 직접 물어봐도 된다.

실제로 TFT 멤버 모두와 사장님과의 면담 자리를 만들어 이것저것 여쭤보았고

사장님은 당신의 생각을 명쾌하게 소통하여 주셨다.

주니어 멤버들 중에서는 그 때 사장님 얼굴을 처음 뵈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 면담 이후 멤버들은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생각을 모으면 정말 조직이 바뀔 수도 있겠구나...
막연하게 생각만 했던 것들이 현실이 될 수도 있겠구나...


12월 말이 되어 TFT장이었던 김책임이 사장님께 최종보고를 드리면서

연구소는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기술을 더 강화하는 의미에서 조직 이름도 '연구소'가 아닌 '기술센터'로 바꾸었고

AI와 Big Data 조직도 이름을 바꾸고 인원을 보강하는 걸로 의사결정을 받았다.

팀도 역할을 재정비하고 팀장들도 서로 역할을 바꿨다.

기획팀장은 TFT 멤버 중의 한 명으로 발탁 임명을 했다.
능력은 출중했지만 아직 연차와 나이가 되지 않아서 기회가 없었는데
누구보다 그 역할을 잘 해내리라 믿었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리고 기술팀이 연구 개발을 할 수 있는 별도의 연구공간도
신규로 마련하겠다고 제안하여 의사결정을 받았다.

멤버들 입장에서는 난생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멤버 전원이 연구소장과 직접 소통하여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고
회사의 운영에 스스로 참여하여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변화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몸으로 경험한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해낸 것이었다.


분위기는 달라졌다.

멤버들도 자신들의 역할과 커리어 변화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되었다.

뭔가 완성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예전 같은 조직은 아니었다.

이 모든 걸 연구소장이 혼자 억지로 할 수는 없다.

핵심은 '참여' 다.

회사에 대한 걱정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걸 속에서 끄집어내주는 게 중요하다.

내가 믿는 것을 해내는 것만큼 신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게 매일 출근을 해서 내 인생의 조각들을 소모해야 하는 회사라면 더욱 그렇다.


처음 연구소장 겸임을 명 받았을 땐 무얼 어떻게 풀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리스럽게 내가 직접 풀려고 하지 않았다.
불안하고 답답했지만 견디려고 노력했다.
그들이 답을 알고 있을 거라 믿고 소통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방향이 잡히기 시작했다.

방향이 잡히고 나니 그들이 실행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된다고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결국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을 돌아보면
20년 넘게 대기업 생활을 해왔던 나 자신에게조차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러니 멤버들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스스로 해야 진짜다.

멤버들이 믿는 걸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고

'해도 된다'라고 말해주는 것.
그게 리더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역할이다.


(TFT, Powered by DALL.E3)


작가의 이전글 033 경청은 마음가짐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