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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mmy Park Mar 14. 2024

근거라는 건 애초부터 없었다

Jailbreak

“The best way to predict the future is to invent it." (Alan Kay)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2010년의 일이다.
당시 나는 LG전자에서 EBO(Emerging Business Opportunity)라는 팀을 리딩하고 있었다.
EBO라는 이름은 IBM의 신사업 프로그램에서 따왔는데 
LG전자가 할 것 같지 않지만 미래에 큰 기회가 될 신사업을 찾고 인큐베이션을 하는 조직이었다.
우리는 새해가 되어 신규 업무를 고민하다가 LTO(LG Technology Outlook)라는 Task를 기획했다.
불확실성이 높고 급박하게 변하는 기술 경쟁 환경 속에서
5년 뒤 경쟁의 화두가 될만한 꼭지를 예측하고 긴 호흡으로 미리 기술 준비를 해보자는 취지였다.
당시 매년 LTO를 진행하여 10개씩의 화두를 제안하고
그중의 일부는 전략 Item으로 선정하여 R&D 과제화까지 진행을 시켰는데,
2010년에 뽑은 10개의 화두 중 하나가 ‘OLED TV’였다.

전 세계 TV 시장은 오랫동안 아날로그 배불뚝이 TV가 주축이었고 그 시대의 왕은 단연 Sony였다.
하지만 Flat Panel TV, 소위 말하는 얇은 디지털 TV가 나온 이후에는 경쟁 구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삼성, LG 등 우리나라 기업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새로운 경쟁에서 헤게모니를 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TV가 디지털 시대로 들어온 이후 기술은 너무도 빠르게 변해 갔다.
프로젝션 TV에서 PDP TV, LCD TV로, 그리고는 바로 LED TV로.
물론 기술적으로 볼 때 LED TV는 LCD TV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제조사가 마케팅을 위해 만들어낸 말이었지만 고객들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냥 LED TV가 더 좋은 최신 TV였던 것이다.
 
그렇게 점점 짧아지는 TV 산업의 경쟁 상황을 감안하면
우리가 Target 했던 2015년에는 LED TV 이후의 새로운 경쟁 화두가 나올 것이라 예상이 되었고,
몇 가지 대안 중 하나로 가설을 잡은 게 ‘OLED TV’였다. 
 
그런데 문제는 'OLED TV'라는 우리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전문 자료에도 2015년까지 TV용 대형 OLED 기술이 급격히 발전할 거라는 예측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파주까지 LG Display OLED 전문가들을 찾아가 인터뷰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수율이 안 나온다." “가격이 너무 비싸다.”, "투자 계획이 없다." "콘텐츠도 문제가 될 것이다."
전문가들도 부정적인 의견 일색이었다.
한 마디로 ‘OLED TV’는 근거 없는 우리의 가설일 뿐, 그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OLED TV’라는 화두를 5년 뒤 10대 유망 Item 중의 하나로만 발표를 했을 뿐
세부 실행전략을 짜야하는 전략 Item으로는 강하게 밀지 못했다.
그렇게 ‘OLED TV’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잊혀 갔다.
 
5년이 지난 2015년 어느 날, 나는 기사의 헤드라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LG전자가 TV사업에서 경쟁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빼든 칼이 ‘OLED TV’라는 기사였다.
삼성은 기존 LED TV의 연장선상에 있던 QLED 기술로 TV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LG는 Pixel이 자체발광을 하는 전혀 새로운 OLED 기술이 미래 TV의 방향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글로벌 TV시장에서 양사가 첨예하게 경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사가 서로 다른 기술을 미는 것이 업계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쨌든 2010년에 향후 5년을 내다보며 ‘OLED TV’라는 화두를 예측했었으니
결과로만 보면 우리가 맞춘 셈이었다. 아이러니했다.
 
재미있는 건,
5년 전 전문가들이 지적했던 많은 이슈들이 그때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율은 여전히 양산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았다.
가격도 일반 제품으로 만들어 팔기에는 턱없이 비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일단 밀어 보겠다는 것이었다.
OLED 기술 자체가 주는 독보적인 화질이 고객 가치를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믿고,
나머지 문제들은 어떻게 든 해결해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선결단을 통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양한 Display 전문 기관들에서 대형 OLED에 대한 장밋빛 전망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대형 OLED의 성장세가 두드러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소형 가전뿐 아니라 Premium TV로서도 OLED가 대세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비로소 객관적인 근거가 생긴 것이다.
5년 전 우리가 찾아 헤맸던 미래 전망 숫자들이 LG전자가 선언한 의지치로 덧씌여졌다. 
그렇게 OLED TV는 시장에서 고객들이 인정하는 최고급 TV가 되어 가기 시작했다. 
 
당시 LTO를 기획하고 실행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는데
가장 큰 수확은 그 이후 다양한 신사업을 해오면서 미래에 대해 사고하는 틀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혁신을 위해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Outlook의 진정한 의미는 점쟁이처럼 미래를 예측하고 맞추는 데 있는 게 아니다. 
최선을 다해 미래에 대한 가설을 세운 후 당신의 의지치를 우선순위화해서 목표를 정하는 데 있다.

5년 전에 우리가 찾아다니던 그 객관적인 근거라는 건 애초부터 없었다.
근거는 당신의 믿음과 의지가 만든다.


(Future TV, Powered by DALL.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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