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mmy Park May 22. 2024

경험이 주는 선물

Jailbreak

“People never learn anything by being told, they have to find out for themselves.” (Paulo Coelho) 


한참 뒤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그의 눈 빛은 반짝였다.


LG전자에서 신사업전략팀장을 할 때였다.

타 본부에서 우리 팀에 오고 싶다는 멤버가 있어서 면담을 했다.

카페에서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니
경력사원으로 LG에 입사한 친구였는데 과거 경력도 나쁘지 않았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팀에 Join 하여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과거 경력을 감안하여 에너지 분야의 신사업을 담당시켰다.
당시 업계의 화두였던 Smart Grid라는 것을 정리하여 발표를 했는데
체계적으로 정리가 잘 되어 매우 만족스러웠다.
아 훌륭한 사람이 우리 팀에 와주었구나... 감사했다.

그리고는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팀장으로서 이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문제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급에 관한 거였다.

회사생활에서 진급이란 건
중요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사실 그건 그 사람의 성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면담을 해보면 성취욕구가 남달리 강한 사람들이 있다.
회사 생활을 통해 뭔가 인정받고 싶고,
그 결과로 빠르게 승진하여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고 싶고,
그래서 더 크고 중요한 일을 맡아 또 보란 듯이 해내고 싶고...
그런 멤버들에게 진급이란 건 매우 중요했다.

그들에게 진급은
자신의 노력이 보상되고 욕구가 만족되고 있다는 증명인 것이다.

그 친구가 딱 그랬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자신의 경쟁력을 더 높이기 위해 시간을 따로 내서
성균관대 MBA를 도전해서 학위를 따기도 했다.

그는 성취욕구가 남들보다 매우 높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고과가 좋지 않았다.
우리 부서에 오기 전에 이미 과거 2년 동안 연속 C가 찍혀 있었다.
왜 그렇게 고과 관리가 안되어 있는지 물어봤는데
첫 해에는 연중 경력 입사 후 같은 팀에 진급 후보자들이 많아서 불이익을 받은 것 같다고 했고
그다음 해에는 조직장과 잘 안 맞아서 마찰이 있었다고 했다.

사실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내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LG에는 진급의 최소한의 Rule이 있어서
올해 내가 아무리 좋은 고과를 주더라도 향후 2년간 승진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같은 나이보다 과장 연차도 2년 늦게 가고 있었는데
그런 Career Path를 타서는
성취욕구가 강한 박과장이 LG에서
본인이 원하는 만큼 성장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 친구의 마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계속 고민이 되었다.

고민 끝에 그 친구를 불렀다.


"박과장, 요즘 내가 고민이 많이 된다."

"네, 어떤...?"

"박과장이 잘 해주고 있어서 너무 고마운데, 현실적으로 진급 이슈가 있다.
박과장 고과 말이야. 과거 고과가 문제야.

내가 아무리 고과를 잘 줘도 미안하지만 올해 차장 승진을 할 수가 없어.
LG에서는 승진 따질 때 과거 3년 치 고과를 보거든.
이 전에 C 두 개 받은 것 때문에 그게 지워질 때까지 최소 2년은 진급이 어려울 것 같아.
그런데 박과장이 지금 동갑 또래보다 이미 한 2년 늦었잖아.
그럼 도합이 4년이야.
이래서는 LG에서 박과장이 원하는 만큼 성장하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 것 같다.

열심히 하는지 아닌지를 떠나서 시스템적인 문제야."

"아..."

"내 박과장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알아. 그래서 더 미안한다."

"..."

"그래서 말인데... 박과장. 오해하지 말고 들어.

혹시 LG에서 일하는 거 말고 다른 거 해보고 싶은 건 없어?"

"네?"

"아니 혹시 평소에 생각해 둔 게 없나 해서..."

"아... 딱히 그런 건 없는데요."

"그래. 난 혹시 박과장한테 더 좋은 Path가 있지 않을까 고민이 돼서 물어봤어.

일단 알겠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좀 더 보자."

"네..."


한 일주일쯤 지났나... 박과장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팀장님, 지난번에 저한테 해주셨던 말씀이요."

"어... 그래."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사실 하나 있는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거..."

"아 그래? 그게 뭔데?"

"반찬사업이요. 반찬사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반찬? 오... 좋은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사실은... 제가 성균관대에서 MBA를 할 때 동기 한 명과 공동 사업기획을 했던 아이템이에요.
처음엔 몰랐는데 계속 구체화하다 보니 정말 될 것 같더라고요."

"아... 그랬구나. 그런데 그거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한 거야?

정말 커리어를 바꿔서 인생을 걸만큼 진지한 거야?"

"네. 한참 고민해 봤는데 그런 것 같아요."

"아... 너무 좋네. 사실 아무리 찾아도 그런 걸 찾기 쉽지 않거든. 잘 됐다.

그럼... 그 사업을 하려면 무슨 준비를 해야 해?"

"반찬사업이 사실은 정부지원사업 캐터고리 안에 들어가는 거라서

특정 교육을 이수하면 일부 자금 지원도 받을 수 있어요."

"아 그래? 좋네... 내가 도와줄 수 있는게 있는지 한번 볼게."


난 같은 층 옆쪽에 자리한 HR 쪽에 가서 설명을 했다.

내가 우리 팀 멤버 한 명을 내보내고 싶은데 회사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퇴사 후 나가서 할 사업을 위해 정부 주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내가 그 기간 동안만 배려를 해주고 싶으니 근태에 양해를 좀 해달라고.

그리고 이 친구가 과거 고과에 C가 두 번 있으니  

1년 치 연봉을 미리 줘서 권고사직 형식으로 내보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마침 전사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던 터라 HR과 이야기가 잘 풀렸고
그 친구는 그렇게 배려를 받으며 퇴사를 하게 되었다.

미리 받은 1년 치 연봉은 그의 초기 사업자금으로 딱이었다.

내가 볼 때 그게 최선의 선택지였다.


그렇게 몇 달을 준비해서 퇴사일이 다가왔다.


"박 과장, 너무 잘 됐다. 퇴사지만 축하해도 되는 거지? ㅎㅎ
알아서 잘 하겠지만, 조바심에서 딱 하나만 이야기하면...

무조건 살아남아라.

철학도 좋고, 사업모델도 좋고, 반찬도 좋고 다 좋지만 먼저 살아남아야 해.

그러려면 뭐든 빨리빨리 바꿔야 할 거야.
스타트업의 생존은 피보팅이 핵심이다. 꼭 명심해..."

"네 팀장님. 잘 알겠습니다. 그동안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꼭 버젓이 성공해서 다시 찾아뵐게요."

"그래. 꼭 그래라.
그때는 내가 박사장한테 거하게 한번 얻어먹을게. ㅎㅎㅎ"


그렇게 퇴사한 지 일 년 가까이 지나서 톡이 왔다.

"팀장님, 회사는 잘 론칭을 했습니다. 언제 한번 찾아뵐게요."


회사 앞에서 다시 얼굴을 마주한 그의 눈 빛은 반짝였다.


"박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얼굴 좋은데... 반찬이 맛있나 봐. ㅎㅎㅎ"

"네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는 잡은 것 같아요 팀장님. 고맙습니다."

"이제는 박사장이 나보다 훨씬 더 어른일 거다.

지금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헤쳐 왔겠어?

나 같은 사람은 아마 상상도 못 하겠지..."

"에이 아니에요 팀장님. ㅎㅎㅎ
근데요... 나오니까 정말 다르긴 다르더라고요.

충분히 준비를 하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어요.

무조건 살아남으라던 팀장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ㅎㅎ"

"그래도 이 정도면 일단 성공인 것 같은데... ㅎㅎㅎ"

"그런데... 그동안 정말 제가 뼈저리게 느낀 게 하나 있어요."

"아 그래? 뭐야 그게?"

"스타트업이 생존하려면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결국 피보팅이더라고요.
직접 해보니 처음 생각했던대로 풀려나가는 게 거의 없어요.
그때 욕심을 버리고 그 순간을 헤쳐나가기 위해 뭐라도 바꿔야 해요.
그러다 운이 좋으면 다시 살아나는 거고...
피보팅을 얼마나 잘하는가가 진짜 생명이에요."
"아... 그렇구나..."
  
 퇴사 전에 내가 해준 말이었는데
 마치 뭔가 대단한 걸 새롭게 발견한 것처럼 내게 돌려준다.
 
 그래...
 그날 내가 그에게 전해준 건 그저 ''이었고
 오늘 그가 내게 전해준 건 '깨우침' 같은 거겠지.
 근사한 사업 전망이나 사업 계획서만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고
 실제 몸으로 뛰며 나락에 떨어져 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피 묻은 훈장 같은 거겠지.
 인정.
 
전쟁을 직접 몸으로 겪어 본 사람의 목소리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
그날 새삼 느끼게 되었다.
경험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었다.
 
그 이후 가끔 네이버의 대문에 올라갔다고 자랑 문자도 오고
내 생일이면 미역국 쿠폰 같은 것도 날라 온다.
그렇게 난 든든한 내 빽으로 반찬가게 사장님이 한 명 생겼다.


(Tea Meeting, Powered by DALL.E3)



이전 06화 비로소 잭 웰치가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