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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mmy Park Apr 16. 2024

029 커서 뭐 되고 싶어요?

Jailbreak

"If you want something you never had, you have to do something you’ve never done." (Thomas Jefferson)


정말 보내기 싫었지만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LG는 외부 유망기술에 대한 '투자'가 중요해 질거라 보고
국내 대기업으로서는 거의 최초로 2000년부터 투자 전담조직을 운영해 왔다.
LBI, KTB와 같은 전문 VC들과 함께 Fund를 결성해서 협력을 해왔고
시장 환경에 따라 부침은 있었지만 비교적 꾸준히 투자를 해왔었다.


LG전자에서 신기술투자팀장을 하던 시절의 일이다.

신임 투자팀장으로서 심사역들과 신규 업무를 논의한 끝에

기술지주회사들과 협업 모델을 추진해 보기로 했다.

팀원 한 명과 나는 KTX를 타고 대전으로 향했고

미래과학기술지주를 만나 협업 논의를 진행했다.

미래과학기술지주는 KAIST, UNIST 등 4개의 과기특성화대학들이 주축이 되어

각 대학에서 연구한 기술의 사업화를 위해 설립한 회사로서

기술 기반 사업을 하는 LG전자와 협업할 부분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이야기는 잘 끝났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대전역으로 갔다.

기차 시간이 약 1시간가량 남아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했고
커피를 한잔 하면서 내가 물었다.
 

"김 과장은 커서 뭐 되고 싶어요?"

"네? 커서요? 저 이미 다 커버려서..."

"사람은 늘 자라고 있는 건데 뭐. 그래서 나중에 뭐 하고 싶어요?"

"음... 너무 갑자기 훅 들어오셔서... ㅎㅎ
저 사실 하고싶은 게 하나 있긴 해요. 전문 투자자가 되고 싶어요."

"아... 그래요? 너무 좋네. 그럼 지금도 딱 그 업무를 하고 있는 거네요."

"그렇긴 한데... 노력해서 전문성을 더 길러야지요."

"생각이 분명하니 너무 좋네요. 이렇게 바로 대답하는 사람 많지 않은데...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ㅎㅎ"

"네."


그 질문을 시작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교 때 한 달만 다니고 몰래 자퇴를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 쇼킹했다.

그리고 다시 대학을 가서 3년간 창업했던 이야기.

지금은 우리가 다 쓰고 있는 키스킨을 김 과장이 만들었는지 몰랐다.

직급에 상관없이 팀원들이 김 과장의 내공을 인정하는 이유가 있었다.

존경스러운 팀원이었다.

내겐 행운이었다.


커서 뭐 되고 싶어요?

난 우리 아이들에게는 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오히려 '커서 뭐 될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하고 싶은 걸 해라'라고 한다.

하지만 친구들이나 팀원들에게는 이 질문을 자주 던진다.

왜냐하면 내가, 많은 내 또래의 친구들이

좋은 성적, 좋은 대학, 좋은 직장만 생각하며 '성실히' 살아오느라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도무지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숲에 나무가 너무 많아서 바쁘다 보니
도끼날을 날카롭게 갈 시간이 없다.

닦을 마루가 너무 넓어서 바쁘다 보니
걸레를 깨끗하게 빨 시간이 없다.

시험 준비에 외울게 많아서 바쁘다 보니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고민할 시간이 없다. 

누가 봐도 참 바보 같다고 말하겠지만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도끼날을 갈고, 걸레를 빨고,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고민을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출장에서 돌아온 뒤 한 달이나 흘렀을까...

갑자기 김 과장이 면담을 신청했다.


"팀장님, 저 회사를 그만두려고 합니다."

"네? 갑자기 무슨..."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세요? 전문 투자자가 되고 싶다고..."

"그럼요. 기억하지요."

"마침 기회가 생겼는데...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아시다시피 국내 VC업계에는 아직도 여성 투자자들의 자리가 많지 않아요.

보통은 도제 시스템으로 심사역들이 키워지는데 일도 힘들고 해서
선배 심사역들이 여성 심사역을 키우려 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마침 기회를 주신다고 해서 이 번에는 꼭 기회를 잡아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그럼 너무 잘 된 거네요."
"팀장님과 일을 더 해보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거기 가셔서도 저랑 일해요. 그러면 되죠. ㅎㅎ"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보내기 싫었다.
이제 막 뭐 좀 함께 해보려고 하는데 에이스를 잃는 격이었으니...
하지만 그날 대전에서 나눴던 그 대화 때문에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김 과장의 마음을 생각해 봤다.
뭔가를 시작하려할 때 엄청난 심사숙고가 필요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것을 멈추려 할 때는
그 보다 몇 배 큰 고민과 남몰래 뒤척이는 밤이 필요하겠지.
어쩌면 진정한 용기는 
미지의 시작을 위해 익숙함을 멈추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용기 낸 그 친구의 앞 길을 축복해 주고 싶었다.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LG를 떠나 전문 VC로 자리를 옮긴 그녀는

특유의 적극성으로 발로 뛰며 스타트업 대표님들의 마음을 살 수 있었고
무신사, 에이블리, 발란, 제이시스메디칼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최고 스타트업들의 투자자가 되었다.
지금은 유망 VC의 Co-Founder가 되어 국내의 대표적인 여성 투자자가 되었으니
커서 되고 싶다던 그 꿈을 보란 듯이 이룬 것이다.

그리고 면담 마지막에 했던 말처럼
그 날 이후에도 난 투자 관련해서 뭔가 이슈가 있을 때마다
마치 함께 일하는 것처럼 그녀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난 LG에서도, 현대에서도 최고의 VC와 함께 일할 수 있었다.

그날 난
회사에서 에이스 팀원을 하나 잃었지만
인생에서 존경스러운 멘토 한 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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