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To sell something familiar, make it surprising. To sell something surprising, make it familiar.” (Derek Thompson)
제품을 파는 게 아니었다. 마음을 사는 거였다.
오랜만에 뵌 최부장님이 가슴팍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셨다.
여러 번 접힌 종이였는데, 펴보니 A4용지에 뭔가를 프린트한 거였다.
접힌 부분이 닳아 찢겨 있는 걸 보니 오랫동안 가지고 다니신 듯했다.
"팀장님, 이게 팀장님이 써주셨던 추천서 이메일입니다.
이거 프린트해서 와이프 보여주면서 자랑했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계속 이거 보여주고 다닙니다 제가.
와이프도 너무 고맙다고 한번 식사라도 모시고 싶다고 했어요."
"아... 부장님. 제가 너무 감사해요. 그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너무 감사했다.
예전에 LG Tone+ 사업을 하던 사업부에서 신사업을 하면서
영업만 20년 넘게 해 오신 두 분 고참 부장님들과 함께 일할 기회가 있었다.
두 분 중 더 고참이신 문부장님을 '영업의 신', 최부장님을 '영업의 달인' 이렇게 불렀다.
'영업의 신', '영업의 달인' 두 분과 다니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다.
"LG 로고 붙이고 Tone+도 못 팔면 어디 가서 영업한다고 하지 마라."
"LG 명함 가지고 있으면 전 세계의 어떤 고객이라도 무조건 한 번은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두 번째부터는 우리한테 달렸다. 그게 진짜 영업 시작이지."
"고객 만나면 우리 영업은 다 대표이사다.
중소기업들 봐라. 큰 건 계약하면 다 대표이사가 나온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네고하고 사인하고 하잖아.
고객한테는 그게 바로 대표이사인 거라. 우리가 다 책임을 지는 거다."
신사업팀장으로서 신제품인 Tone+ Studio를 어떻게 하면 팔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B2B 번들링 아이디어를 내서 쫓아다녔었다.
통신사 제휴를 위해 국내에서는 U+, 일본 출장 가서 Docomo를 만나기도 했고
당시 케이블 TV 점유율이 높았던 티브로드를 만나 사은품 모델을 논의하기도 했다.
영업의 달인 최부장님과 함께 티브로드 구매팀장님을 만나러 갔을 때였다.
부장님이 잘 아시는 분이라 미리 약속을 잡고 충무로까지 갔는데, 도착하자마자 전화가 와서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오늘은 만나기 힘들겠다고 미안하다고 하는 거였다.
부장님은 괜찮다고, 마침 오후가 프리라서 기다릴 수 있으니 천천히 나오시라고...
결국 밑에서 3시간 넘게 기다렸다가 잠깐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괜히 내가 미안하여...
"괜찮으세요 부장님?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으시지 너무 오래 기다리셨네.
아무튼 오늘 너무 수고하셨어요."
"아니에요 팀장님. 지금 느낌 아주 좋아요.
아무리 친하더라도 비즈니스는 비즈니스거든요. 결국 다 사람이 하는 거고.
이렇게 한번 오래 기다려주면 알게 모르게 마음의 빚 같은 게 생겨서
다음에 뭐 하나라도 도와주려는 마음이 생기게 돼요.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한테는 이렇게 오래 기다릴 수 있는 게 아주 좋은 기회예요.
이건 꼭 제가 잡아 올게요. 느낌 좋아요... ㅎㅎㅎ"
아... 존경심.
제품을 팔러 다니는 게 아니고
고객들의 마음을 사러 다니는 거였구나.
그런데 몇 달 후,
이렇게 훌륭한 영업의 달인이 이동할 다른 부서를 찾아야만 했다.
CEO가 새로 오신 후 조직 전체가 흔들리며 우리 팀이 아예 없어지게 된 것이다.
다른 주니어 멤버들은 비교적 빠르게 갈 곳이 정해진 편인데
최부장님은 너무 고참이라 다른 조직들이 모두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하루하루가 갈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팀장으로서 부장님께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곰곰이 생각하다 부장님의 영업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 B2B 쪽이라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나는 B2B 사업본부의 본부장님께 이메일을 쓰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그분을 알지는 못했지만 일전에 강연을 한번 들은 적이 있었다.
무모했지만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불쑥 메일을 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일전에 최정예인재 모임에서 사장님의 강연을 들었던 박만수라고 합니다.
오늘 메일을 드리게 된 건 제가 아는 최고의 영업맨을 추천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메일을 드렸는데 사장님께서 바로 답장을 주셨다.
좋은 분을 추천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본인이 직접 인터뷰를 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부하직원의 말에 귀 기울여 주시는 좋은 리더셨다.
너무 다행이었다.
인터뷰 전날, 나는 부장님과 날 술 한잔 하면서 말씀드렸다.
"부장님. 걱정 마세요. 잘하실 거예요.
전 이 영업세계에서 부장님처럼 좋은 상품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최고의 상품 하나 못 팔면 그게 영업입니까? ㅎㅎㅎ
내일은 부장님을 파시는 겁니다.
지금까지 하시던 대로... 꼭 잡아 오세요.
잘 되실 거예요. 느낌 아주 좋아요... ㅎㅎㅎ"
당일 저녁, 인터뷰는 1시간을 훌쩍 넘겨 많은 이야기를 했고 분위기도 좋았다고,
감사하다고 부장님께 문자가 왔다.
결국 부장님은 그쪽으로 이동하셨고, 한참 동안 또 영업의 현장을 누비셨다.
참 아련한 기억이다.
왜 영업을 사업의 꽃이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고객과의 미팅 후 함께 기울이며 마시는 맥주가 얼마나 시원한지...
매몰차게 거절을 당해도 어떻게 다시 견디고 넘어서야 하는지...
돈 주고도 못 사는 최고의 시간.
성장의 경험이었다.
PS.
그 후 한참이 지난 후 난 현대글로비스에서 사업부장을 맡게 되었고
영업을 담당하던 나이 어린 매니저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영업 현장에 나가면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글로비스 대표이사입니다.
최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판단하시고 여러분이 믿는 대로 행동하세요.
그러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