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True friends are never apart, maybe in distance but never in heart.” (Helen Keller)
1.3억 원 때문에 CFO께 네 번을 직접 보고 드려야 했다.
LG에서 투자팀장을 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 Portfolio사 중에 메모리 효율화 기술을 개발하는 미국의 A사가 있었다.
우리는 A사에 당시 십여억원의 금액을 투자했었고
그 기술을 우리 가전제품들에 적용을 해보려고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많은 스타트업이 그렇듯 그들의 기술개발은 계획 대비 지연되었고
기술개발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추가 펀딩이 필요하게 되었다.
다행히 미국의 다른 투자자가 나서서 넥스트 펀딩 시리즈를 리딩하게 되었고
현재의 지분과 조건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추가 투자(Pro-rata)에 대한 의향을
우리에게 물어 왔다. 총금액을 환산하면 약 1.3억 원 수준이었다.
지분도 지분이었지만, Pay to play 조항 때문에
우리가 우선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따라가야 하는 투자였다.
1.3억 원을 추가로 날릴 수 있는 Risk보다
우선주를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Upside Potential이 더 크다고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CFO께서 반대를 하시는 거였다.
나는 우리 팀 담당자인 Robert와 함께 CFO 보고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Robert는 캐나다에서 자라고 Waterloo 공대까지 졸업한 캐나다 시민권자였다.
영어는 원어민 수준 정도가 아니라 그냥 원어민이었고
한국 회사에서 수년을 근무한 덕에 한국말도 어색하지 않은 수준으로 잘했다.
CFO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투자법에 대해 꾀 깊숙이 공부를 해야 했고
추가 투자 관련 규정을 상세히 파악하여 근거를 조목조목 설명드릴 필요가 있었다.
Robert가 영어와 한국어를 완벽하게 Bilingual로 구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Robert는 혼자 남아 복잡한 영어 문서들을 밤늦게까지 찾아보며 정리를 했고
보고서는 나와 이야기를 해가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결국 CFO께는 세 번의 퇴짜를 맞은 후 네 번째 보고에서 통과를 했다.
우리가 그전 시리즈에서 투자하면서 얻은 권리들을
후속 투자자가 어떻게 맘대로 바꿀 수 있는가가 CFO의 근본적인 질문이었고
법무팀장 부사장을 직접 불러서 미국 투자 관련 법령을 더블체크한 후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겨우 허락을 해주셨다.
Robert에게 너무 고마웠다.
사소해 보이는 Follow-on 투자 1.3억을 해보겠다고
거의 몇 주 동안 매일 늦게까지 남아서 열심히 근거를 만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언어 능력도 출중했지만 책임감과 Attitude가 너무 훌륭했다.
최고의 인재 하나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몇 년 후 나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사업부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바뀐 미션에 맞춰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Robert가 조만간 퇴사를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같은 부서는 아니었지만 LG가 그런 훌륭한 인재를 놓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바로 Robert에게 전화를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연한 기회에 SK의 투자조직에서 오퍼를 받았다고 했다.
조건이 너무 좋았다. 특히 연봉은 수천만 원 이상 차이가 있었다.
내가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Robert를 떠나보내는 게 너무 아쉬웠다.
Robert에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난 HR부서에 전화를 했다.
"지금 Robert가 퇴사를 하려고 고민 중이라고 하는데요.
이 친구 무조건 잡아야 합니다.
채용 많이 해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영어 한국말이 자유자재로 되면서 기술적 이해도도 있고
무엇보다 이렇게 책임감 있는 사람 어디 가서 절대 못 구합니다.
LG가 놓쳐서는 안되는 최고의 인재라는 말이에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연봉을 올려주시든지, 특별 보너스라도 주시든지...
어떻게든 이 친구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봐 주세요. 부탁합니다."
HR부서에서는 난감해했다. 이런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계속해서 강하게 이야기를 하니 그쪽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내부적으로 이런저런 논의를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내게 말했다.
"Robert한테 일단 천만 원 특별 보너스를 주겠다고 1차 제안을 했습니다.
반응을 한번 보고 그걸로 안되면 2천만 원으로 올려서 다시 제안해 볼게요.
CTO 사장님 버젯 중 일부를 돌려서 사용하기로 하고 제안을 한 건데
아시다시피 이 것도 사실 전례가 없던 거예요.
큰돈은 아니지만 저희로서도 나름 파격적인 제안입니다."
"아니 저 쪽에서 제안한 연봉만 수천만 원 차이가 나는 것 같은데
겨우 특별보너스 한번, 그것도 일이천만 원으로 그게 되겠습니까?
조금만 더 파격적인 제안이 필요합니다. 정말 놓치기 아까운 인재라서 그래요.
회사를 위해서 다시 한번만 고민 부탁드려요. 죄송합니다."
며칠 동안 그렇게 HR과 몇 번의 핑퐁이 오고 갔다.
결국 연봉이나 특별보너스로는 간극이 좁혀지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그 사이 실리콘밸리 오피스에서 Robert에게 함께 일해보자는 오퍼를 주셔서
그걸로 Robert의 마음을 가까스로 돌릴 수 있었다.
"Robert, 그게 차라리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LG든 SK든 일은 비슷할 거야. 물론 연봉의 차이가 있다고 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수도 있고...
가족들과 실리콘밸리에 가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가장으로서 가족들에게 그런 경험을 줄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기회야.
그리고 그렇게 LG의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있다 보면
나중에 우리가 또다시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있겠지.
그때까지 잘 버티고 있어라. 알겠지? ㅎㅎㅎ"
"네 팀장님. 이 번에 신경 많이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실리콘밸리에서 가족들과 생활하고 일해보는 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요.
팀장님이 신경 많이 써주셔서 SK 안 가고 계속 LG에 남게 되었네요.
진심 감사드려요. 미국에 오시면 꼭 연락 주세요."
그렇게 Robert는 LG 실리콘밸리 오피스로 이동을 하였고
한참을 그렇게 LG에서 일을 했다.
나중에 내가 현대 글로비스로 옮긴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연락을 했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Robert도 현대의 오픈이노베이션 조직인 크래들 실리콘밸리로 이동을 하였다.
LG에서의 인연은 현대로 이어지고
이제는 회사를 떠나 그냥 인생의 친구처럼 이어지고 있다.
살다 보면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진다.
그 우연한 만남이 어떤 계기를 통해 특별하게 계속 연결되기도 하고
시간이 흐름 속에 묻혀 희미하게 사라지기도 한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좋은 친구들과 인연의 끈은 놓지 않으려 한다.
자주 볼 수 없어도 마음속에 살아있다면 언젠간 다시 만난다.
오랜만에 얼굴 마주해도 어색하지 않게 웃을 수 있다.
그런 게 좋은 인연이다.
내 삶에 좋은 인연들이 있음에 감사하다.
PS.
한참 지나서 나중에 글로비스에서 Robert를 다시 만났다.
현대 크래들 실리콘밸리 출장자 자격으로 우리 회의실에 불러서 미팅을 했는데
그 방 미팅 참석자 6명 중 5명이 LG에서 오픈이노베이션 업무를 했던 친구들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LG에서 현대로 해쳐모여할 수가 있지?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거구나...
회의가 끝나고 Robert가 말했다.
"상무님, 그때 우리가 추가 투자했던 A사 이야기 들으셨어요?
드디어 LG가 Exit을 했습니다. 얼마 전 A사가 Qorvo에 매각되면서 돈을 뺐어요.
그때 우리가 1.3억 추가 투자를 해서 우선주 조건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이번 Exit 할 때 4배 가까이 수익을 냈다고 들었어요.
그때 밤늦게까지 남아서 했던 일이 결실을 맺었네요. ㅎㅎㅎ"
"정말? 너무 잘 됐네. Robert는 인센티브 받아야 하는데 괜히 옮겼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