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If you want something you never had, you have to do something you’ve never done." (Thomas Jefferson)
정말 보내기 싫었지만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LG전자에서 신기술투자팀장을 하던 당시
각 대학들과 연계된 기술지주회사들과 협업 모델을 추진해 보기로 했었다.
팀원 한 명과 나는 KTX를 타고 대전으로 향했고
미래과학기술지주를 만나 협업 논의를 진행했다.
미래과학기술지주는 KAIST, UNIST 등 4개의 과기특성화대학들이 주축이 되어
각 대학에서 연구한 기술의 사업화를 위해 설립한 회사로서
기술 기반 사업을 하는 LG전자와 협업할 부분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이야기는 잘 끝났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대전역으로 갔다.
기차 시간이 약 1시간 가량 남았길래
근처 까페에서 커피를 한잔 하면서 내가 물었다.
"김 과장은 커서 뭐 되고 싶어요?"
"네? 커서요? 저 이미 다 커버려서..."
"사람은 늘 자라고 있는 건데 뭐. 그래서 나중에 뭐 하고 싶어요?"
"음... 너무 갑자기 훅 들어오셔서... ㅎㅎ
저 사실 하고싶은 게 하나 있긴 해요. 전문 투자자가 되고 싶어요."
"아... 그래요? 너무 좋네. 그럼 지금도 딱 그 업무를 하고 있는 거네요."
"그렇긴 한데... 노력해서 전문성을 더 길러야지요."
"생각이 분명하니 너무 좋네요. 이렇게 바로 대답하는 사람 많지 않은데...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ㅎㅎ"
"네."
그 질문을 시작으로 김과장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교 때 한 달만 다니고 몰래 자퇴를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 쇼킹했다.
그리고 다시 대학을 가서 3년간 창업했던 이야기.
지금은 우리가 다 쓰고 있는 키스킨을 김 과장이 만들었는지 몰랐다.
직급에 상관없이 팀원들이 김 과장의 내공을 인정하는 이유가 있었다.
존경스러운 팀원이었다.
내겐 행운이었다.
커서 뭐 되고 싶어요?
난 우리 아이들에게는 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오히려 '커서 뭐 될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하고 싶은 걸 해라'라고 한다.
하지만 친구들이나 팀원들에게는 이 질문을 자주 던진다.
왜냐하면 내가, 많은 내 또래의 친구들이
좋은 성적, 좋은 대학, 좋은 직장만 생각하며 '성실히' 살아오느라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도무지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숲에 나무가 너무 많아서 바쁘다 보니
도끼날을 날카롭게 갈 시간이 없다.
닦을 마루가 너무 넓어서 바쁘다 보니
걸레를 깨끗하게 빨 시간이 없다.
시험 준비에 외울게 많아서 바쁘다 보니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고민할 시간이 없다.
누가 봐도 참 바보 같다고 말하겠지만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도끼날을 갈고, 걸레를 빨고,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고민을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출장에서 돌아온 뒤 한 달이나 흘렀을까...
갑자기 김 과장이 면담을 신청했다.
"팀장님, 저 회사를 그만두려고 합니다."
"네? 갑자기 무슨..."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세요? 전문 투자자가 되고 싶다고..."
"그럼요. 기억하지요."
"마침 기회가 생겼는데...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아시다시피 국내 VC업계에는 아직도 여성 투자자들의 자리가 많지 않아요.
보통은 도제 시스템으로 심사역들이 키워지는데 일도 힘들고 해서
선배 심사역들이 여성 심사역을 키우려 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마침 기회를 주신다고 해서 이 번에는 꼭 기회를 잡아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그럼 너무 잘 된 거네요."
"팀장님과 일을 더 해보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거기 가셔서도 저랑 일해요. 그러면 되죠. ㅎㅎ"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보내기 싫었다.
이제 막 뭐 좀 함께 해보려고 하는데 에이스를 잃는 격이었으니...
하지만 그날 대전에서 나눴던 그 대화 때문에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김 과장의 마음을 생각해 봤다.
뭔가를 시작하려할 때 엄청난 심사숙고가 필요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것을 멈추려 할 때는
그 보다 몇 배 큰 고민과 남몰래 뒤척이는 밤이 필요하겠지.
어쩌면 진정한 용기는
미지의 시작을 위해 익숙함을 멈추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용기 낸 그 친구의 앞 길을 축복해 주고 싶었다.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LG를 떠나 전문 VC로 자리를 옮긴 그녀는
특유의 적극성으로 발로 뛰며 스타트업 대표님들의 마음을 살 수 있었고
무신사, 에이블리, 발란, 제이시스메디칼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최고 스타트업들의 투자자가 되었다.
지금은 유망 VC의 Co-Founder가 되어 국내의 대표적인 여성 투자자가 되었으니
커서 되고 싶다던 그 꿈을 보란 듯이 이룬 것이다.
그리고 면담 마지막에 했던 말처럼
그 날 이후에도 난 투자 관련해서 뭔가 이슈가 있을 때마다
마치 함께 일하는 것처럼 그녀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난 LG에서도, 현대에서도 최고의 VC와 함께 일할 수 있었다.
그날 난
회사에서 에이스 팀원을 하나 잃었지만
인생에서 존경스러운 멘토 한 명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