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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mmy Park May 03. 2024

복잡하다면 모르는 것이다

Jailbreak

“The limits of my language are the limits of my mind. All I know is what I have words for.” (Ludwig Wittgenstein)


한 장 짜리 전략보고서는 정말 한번 눈으로 보고 싶었다.


LG생활건강 최장수 CEO로 차석용부회장이란 분이 계셨다.

회사 오너가 아닌데도 이례적으로 대기업을 18년간 이끈 슈퍼 CEO.

임기동안 매출과 영업이익을 한해도 빠짐없이 지속 성장시키는 성과를 보였다.
매일 오전 6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을 지키며 업무에 몰입했고
일과 후에는 계속 온갖 장소들을 수행원 없이 혼자 돌며

시장 트렌드에 대한 감을 익혔다고 한다.

효율과 스피드를 중시하여 과감히 의사결정 하고

치열하게 핵심에 집중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오래전 LG그룹은 연 2회 회장님께 보고를 드리는 정례 일정이 있었다.

상반기에는 올해의 전략, 하반기에는 올해 성과 및 내년 계획을 보고한다.

모든 그룹사 주요 전략조직 멤버들이 달라붙어서 한 달 이상 준비하고
본분은 20장이지만 유첨까지 하면 족히 100장은 될만한 보고서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LG생활건강 차부회장님은
매번 본인이하고 싶은 말을 손수 한 장으로 정리하여
회장님께 직접 들고 가서 보고하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난 개인적으로 그 한 장짜리 보고서를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정말 그랬다면 당시 LG그룹의 분위기에서 상당한 파격이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한 해 동안의 전략과 성과를 한 장으로 만든다.

업계와 사업에 대한 통찰과 자신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아는 만큼 쓰는 것이다.

자신 있는 만큼 빼는 것이다.


 단순한 문제를 복잡하게 말하는 데는 지식이 필요하고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말하는 데는 내공이 필요하다.
 아는 것은 쓰고 싶다.
 힘들게 쓴 것은 버리기 싫다.
 지식의 저주는 마지막까지 글 쓰는 사람을 괴롭힌다.
 ("대통령의 글쓰기" 中에서)


지식의 저주라는 것이 어디 비단 글 쓸 때뿐일까?

지식을 자랑하기보다는 내공을 쌓아야 한다.


난 글을 쓸 때 가급적 술술 익히게 쓰려고 한다.

긴 단어보다는 짧은 단어, 어려운 단어보다는 쉬운 단어.
가급적 문장을 짧게 끊어
빠른 호흡으로 읽히게 쓰려고 한다.

그리고 글자 수를 줄이려고 노력한다.

글자수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읽기가 훨씬 편해진다.


글은
더 이상 더할 게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게 없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일상생활에서는

마음을 소래 내어 말로 내뱉고 나면
후회가 들 때가 많다.

말이란 게 얼마나 허술한지...

설명하려 할수록 상대에게 가닿지 못한 단어들만이
바닥에 너절히 흩어질 뿐

원래 전하려 했던 마음속 알맹이는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고 허공을 떠돈다.


생각을 글로 써 내려간 후에 다시 읽어 봐도
늘 부족함을 느낀다.

이게 아닌데... 이 말이 아닌데...

말하고자 하는 건 머리 한 구석에 그대로 있는데

노트 위의 글자들은 결코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하얀 종이 위의 잉크조각으로 남는다.


"People never mean what they say, people never say what they mean."


Boston College에서 공부할 때 철학시간에 들은 말인데 잊히지가 않는다.

말과 의도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

인식의 해상도와

언어의 해상도 간의 차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통해 언어의 해상도를 높여서

생각을 더 세밀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오히려 인식의 해상도를 낮추어

심플하게 핵심만을 뽑아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세밀한 내면의 감정을 표현할 때는

언어의 해상도를 높여서

근처를 헤집지 않고 바로 그 마음을 미묘하게 표현해야 하지만


큰 철학이나 전략을 이야기할 때는

오히려 인식의 해상도를 낮추어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궁극의 본질에서 뽑아내야 한다.


감정이든, 생각이든
전략이든, 철학이든
핵심을 짚어야 한다.

조금 모자라도 괜찮다.
복잡하다면 모르는 것이다.


(Reporting, Powered by DALL.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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