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The people who are crazy enough to think they can change the world are the ones who do." (Steve Jobs)
밴쿠버에서 돌아오는 길의 석양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다.
2019년 여름, 미국 시애틀 Amazon 본사에 갈 일이 있었다.
LG그룹의 신사업 중 하나에 대해 협업 논의를 하고
Amazon의 관련 사업을 파악하기 위한 워크숍이 잡혔다.
당시 그룹의 관심사라서 사장님도 직접 참석하시게 되었다.
갑자기 출장이 결정되는 바람에
과장님 한 분과 내가 하루 먼저 나가 사전 준비를 하다가
다음 날 비행기로 오시는 사장님을 모시러 공항에 나가기로 했다.
비행기 일정 상 사장님이 오전 일찍 도착하시는데
Amazon과의 워크숍은 그다음 날이라서
도착 당일 반나절 이상의 일정을 현지에서 급조해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둘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 생각을 해봐도
할 일도 마땅치 않고 모시고 갈 곳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스타벅스 1호점이나 스페이스니들 같은 곳은 열 번도 더 다녀오셨을 테고...
도착 시간은 다가오고 둘이서 난감해하고 있는데
공항에서 사장님이 나오시면서 하시는 말씀.
“여기서 밴쿠버가 먼가? 거기나 슬슬 다녀올까? 시간도 많은데...”
“좋네요. 사장님. 저희가 미리 준비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에이, 너희가 어떻게 사장한테 밴쿠버 놀러 가자고 이야기를 하니?
그런 말은 내가 해야 하는 거지.”
공항에서 나와 그 길로 바로 밴쿠버로 운전해 올라갔다.
키 큰 나무들이 있는 공원에 들러서 외나무 나리 계곡을 건너기도 했고
개스타운에 증기시계 옆에서 분위기 있는 저녁도 먹었다.
5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해서 다시 내려오는 길은 석양에 불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더해 신비로운 하루가 되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출장이었다.
그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꼭 놀러 가자는 말이 아니더라도
리더만이 할 수 있는, 리더가 먼저 해줘야 하는 말이 있구나.
아주 사소한 순간이었지만, 그날 이후
리더의 말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리더의 말은 매우 중요하다.
샐 수 없이 많은 귀들이 리더의 입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리더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허공에 흩어지는 게 아니라
새로운 행동을 유발하고
그 행동들이 결국 변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리더라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첫 째, 리더는 일관된 말을 해야 한다.
리더에게 가장 필요한 성품 중 하나는 예측 가능성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리더가 기분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말을 한다면
멤버들은 리더의 말을 듣기보다는 리더의 기분을 살핀다.
말의 내용은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이럴 때 우리 리더라면 뭐라고 말할까...
바로 대답이 나올 수 있다면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리더는 이미 많은 말을 한 것이다.
얼마 전 음식점에서 일행 중 한 명이 반찬에서 돌을 씹었다.
이를 보더니 서빙 보시던 분이 달려와서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였다.
달려가서 반찬을 바꿔주면서 혹시 치아는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떠나기 전에 일행 모두에게 커피를 하나씩 주면서
죄송해서 드리는 것이니 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돌이 나온 건 기분 좋지 않았지만 그분의 대응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말단 직원 같아 보였는데 어떻게 저렇게 빨리 대응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지배인이 늘 고객 입장에서 옳은 일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었을까...
고객의 입장에서 옳다고 믿는 대로 하면 된다고...
리더의 일관된 말은 멤버들이 안심하고 옳은 행동을 하게 한다.
하지만 일관된 말을 한다고 해서
이미 한 말에서 잘못을 발견했는데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방금 한 말이 옳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면
발견 즉시 사과하고 오히려 그 말을 번복하는 게 일관된 것이다.
뱉은 말에 일관된 게 아니라 옳은 말에 일관되어야 한다.
유리한 일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라고 말해야 한다.
리더는 끝까지 일관되게 말해야 한다.
둘째, 리더는 결정의 말을 해야 한다.
리더는 성과를 내야 하고 대부분의 성과는 뭔가를 실행함으로써 얻어진다.
그러려면 Go인지 No-Go인지 분명하게 말을 해야 한다.
원천기술, 신사업, 미래전망 등 불확실성이 높고 오래 걸리는 일일수록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두리뭉실하게 말하는 리더들이 있다.
책임지기 싫은 리더는 판단을 미룬다.
그런 리더는 조직의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예전에 한 리더와 회의만 하면 부서장들이 늘 다시 모이는 경우가 있었다.
저마다 들은 말들을 주섬주섬 꺼내놓고
리더가 한 말이 뭐였는지 해석을 위한 재논의를 했다.
무슨 코멘트와 지시를 하셨는지... 내가 들은 뉘앙스가 맞는지...
웃지 못할 일이지만 그분들은 매우 진지했다.
리더의 말이 애매하여 의사결정이 불분명하다는 것도 문제지만
못 알아들은 것을 그 자리에서 물어보지 못하는 문화가 더 문제다.
잘 모르더라도 명확하게 결정해야 한다.
혹시 잘 못된 결정이라면 발견 후 빠르게 바꿔서 재결정하면 된다.
가끔은 옳은 결정보다 용기 있는 결단이 더 중요하다.
리더는 옳은 걸 결정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결정한 걸 옳게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
셋째, 리더는 긍정의 말을 해야 한다.
멤버들은 누구보다 열정이 있고 의지가 있을 수 있지만
어디까지가 되고 어디까지는 안되는 건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해도 된다'라고 말하는 것.
리더의 긍정적인 말은 큰 힘을 발휘한다.
미국이란 나라가 어떻게 세계 최강대국이 될 수 있었을까?
MIT Media Lab에 머물면서 어렴풋이 느꼈던 그네들의 저력이 그런 거였다.
학교에 가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리는 말.
"너무 좋은 생각이다." "재밌겠다." "한번 해보자."
아무리 엉뚱한 생각이라도 취지가 좋고 의미가 있다면 그들은 늘 그렇게 말했다.
자꾸 그렇게 말하다 보니 정말 괜찮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다 보니 그걸 직접 해보는 사람들도 나오고.
해보다 보니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세상의 많은 혁신은 그 나라에서 나온다.
긍정의 말은 힘이 있다.
리더는 끝을 열어주는 말을 해야 한다.
가능성을 열어주고, 방법을 열어주고, 판단을 열어주고...
믿어주는 리더 아래서 멤버들의 열정이 자라나고
열정들이 모여 성과를 끌어낸다.
해도 되는 만큼 해낼 수 있다.
"나라의 구조를 국민이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직원이 회사 구조를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회사가 먼저 직원들에게 '베터박스에 서세요. 도전해도 좋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직원들이 도전해서 배트를 휘두르면,
'왜 그런 볼에 휘둘렀어?'라고 말하고 싶더라도 참고 '나이스 스윙'이라고 말해주는 것이죠.
직원들이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열심히 일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사장인 제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도요타 아키오, "왜 다시 도요타인가" 중에서)
2016년 도요타의 실적 발표회 때 아키오 CEO가 한 말이다.
저 배경에, 줄 사이, 단어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겠냐만은
조직의 꼭짓점에 있는 사람은 저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도전해도 좋습니다. 나이스 스윙..
리더가 해야 하는 말이 있다.
리더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그 말을 해야 리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