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Stay committed to your decisions, but stay flexible in your approach." (Tom Robbins)
유산슬, 다나까, 침착맨, 뉴진스님... 부캐가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몇 년 전에 유산슬이라는 가수가 나와 트로트계에서 1위를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엔 한 예능에서 가벼운 기획으로 시작되었지만
실제 트로트 신곡을 내서 사랑도 받고 그 해 신인상도 거머쥐었다.
이는 요즘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부캐'라는 개념을 대중에게 알린 계기가 되었다.
유재석이 최고 MC로서의 본캐를 그대로 유지한 채
유산슬이라는 부캐로 활동할 때 관객들은 그 자유로움과 가벼움에 열광했다.
노래 하나로 승부를 봐야 하는 실력파 가수들의 간절한 무대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가볍고 유쾌한 무대에 관객들은 해방감을 느낀다.
부담 없이 즐기며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그때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부캐의 가벼움에 대해...
가벼움의 힘에 대해...
처음 LG에서 글로비스로 회사를 옮기려 했을 때 고민도 많았지만
결국 옮기기로 결심을 하게 된 이유 중에는 '물류'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물류는 사업의 수명이 없는 좋은 업종이다.
세상이 유지되는 한 누군가는 물리적으로 물건을 날라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현재 물류 업계는 너무 주먹구구식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젠 물류판에도 혁신이 일어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 변화의 판에서 내가 뭔가 할 역할이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한국 최고 물류회사인 글로비스로 옮기고 나서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음을...
물류 업계에서 기술이 요동치고 많은 혁신들이 일어나고 있는 건 맞았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건
정작 물류회사에서는 그 혁신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물류의 혁신은 선두 유통회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로봇과 자동화 설비, 시스템의 혁신은
글로비스가 아닌 아마존, 쿠팡, SSG, 징둥, 다이소 등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물류회사에서 물류란 본캐다.
물류를 운영하는 것이 비즈니스 자체이고 그 과정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다.
물류회사는 화주들의 요청을 실행해야 하는 을의 위치라서
갑님들이 물류자동화를 먼저 요청하지 않는 한 선투자를 하기는 쉽지 않다.
자동화를 위해 수십억, 수백억을 선투자 하게 되면
그 투자가 빛을 보기까지 적어도 5~10년 이상의 적자를 버텨줘야 하는데
오너가 아닌 이상 그런 투자를 의사결정 할 전문경영인은 거의 없다.
물류 자체에서 ROI 승부를 봐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반면 유통회사에서 물류는 사업이 아니라
그들의 본캐 유통사업을 하는데 필요한 기능 중 하나에 불과하다.
과거에는 물류의 부가가치가 작아서 비용을 최소화하는 게 유리한 상황이었다면
이젠 물류가 그들의 본사업인 유통 경쟁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어
오히려 물류의 혁신에 과감한 투자를 의사결정하는 곳이 많아졌다.
어찌 보면 유통회사에게 물류는 부캐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부캐인 물류 혁신을 위해 선투자하여 돈을 좀 잃더라도 괜찮다.
본캐인 유통에서 돈을 더 많이 벌면 되기 때문이다.
유산슬이 트로트 신곡을 내서 크게 히트를 치지 못하더라도
유재석이 만능 엔터테이너로서 국민 MC의 입지를 다지는데 도움이 된다면 괜찮은 것이다.
콘텐츠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으로 영화의 글로벌 강자는 할리우드였다.
할리우드에 배우들이 모이고, 제작사가 모이고, 배급사가 모이고
엄청난 규모의 투자를 수반하여 블럭버스터 대작들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엔 늘 손익분기점이라는 말이 따라붙어 왔다.
총 얼마를 투자했으니 극장 관객이 얼마나 들어야 이익이 나는지에 대한 계산이다.
전통적인 할리우드에서 콘텐츠 제작은 본캐다.
PF(Project Financing)로 돈을 끌어모아 투자한 후 매 작품의 ROI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첫 편에 투자 이상 수익을 내야 다음 편을 제작할 수 있게 된다.
한 편 한 편 승부를 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지형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2013년 Netflix가 오리지널 콘텐츠인 '하우스 오브 카드'를 출시하며
콘텐츠 플랫폼 회사가 직접 투자하여 영화와 드라마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우스 오브 카드'는 비평가들과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에미상까지 수상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Netflix뿐만 아니라 Disney+, Amazon, 티빙에 심지어는 쿠팡까지
수많은 플랫폼기업들이 직접 투자하여 자신들의 오리지널 시리즈를 만들고 있다.
플랫폼기업에게 오리지널 시리즈는 부캐와 같은 것이다.
제작하는 콘텐츠 하나하나에서 손익분기점을 넘길 필요가 없다.
그들이 제작 투자했던 콘텐츠들 중 많은 작품들에서 손해가 나더라도
몇몇 오리지널 시리즈의 메가히트를 통해
그들의 본캐인 유통사업 회원을 더 모으고 사업을 키울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훨씬 가볍고 더 긴 호흡으로 다양한 시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특히 오리지널 콘텐츠를 전 세계 시청자의 안방으로 24시간 직접 배달해 줄 수 있다는 것은
오리지널 시리즈 제작의 자유도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이렇게 부캐의 가벼움은 점점 더 무서워진다.
옛 말에 "한 우물만 파라."는 말이 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한 분야에서 전문성으로 승부를 보라는 말이다.
물론 한 우물만 파서 독보적인 전문성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젠 충분치 않다.
한 우물만 쳐다보며 계속 땅을 파내려 가는 것만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읽을 수 없다.
주위를 둘러봐야 한다. 세상의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비즈니스 구조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경쟁구도가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고객은 돈내기 전에 무엇을 고민하고 왜 지갑을 여는지...
유연함으로 게임의 룰을 바꾸는 자가 이긴다.
이기기 위해 본캐의 경쟁력을 갈고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큰 흐름 속에서 이길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본캐와 부캐를 넘나들며 고민을 해야 한다.
때로는 본캐의 절실함보다 부캐의 가벼움이 더 강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