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Life is very interesting. In the end, some of your greatest pains become your greatest strengths." (Drew Barrymore)
매일 만나던 그 친구를 본 것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삼성전기에서 무선랜 제품을 개발하던 당시의 일이다.
난 소프트웨어 개발자였지만 주요 고객사 대상으로 직접 기술영업을 다니곤 했는데
미국의 Compaq을 고객사로 뚫어 장기 출장을 여러 번 가게 되었다.
Compaq은 당시 Dell, Gateway, Sony 등과 함께 IBM 호환 PC 제조사 중 하나였는데
전 세계에서 2위의 판매고를 달성할만큼 성공적인 사업을 하고 있었다.
핵심은 그들의 기술력이었다.
부품을 사다가 조립하여 팔던 타제조사와는 달리 그들은 자체 기술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세계 최초로 IBM 호환 랩탑 컴퓨터를 만들었다가 IBM에 고소를 당했는데
IBM 기술 분석 후 그들의 특허를 비껴나가게 설계를 했기에 IBM에게 소송에서 이길 정도였다.
그 후 Compaq은 Intel, Microsoft와 손잡고 386 컴퓨터를 만들어 성공시켰다.
그들은 거침없었고 미래는 탄탄대로로 보였다.
2000년대 초반 나는 휴스턴에 있는 Compaq 본사에 출장 가서 호환성 테스트를 진행하였다.
Compaq의 담당자는 David였는데 엔지니어 경력이 20년 정도 되는 베테랑이었다.
David와 짝이 되어 거의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했는데 나름 코드가 잘 맞아서 친해졌다.
출장 나온지 한 3주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날 기능 테스트는 모두 완료했으니 다음날은 셋업 프로세스를 점검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퇴근 후 호텔로 돌아와 무심코 TV를 켰는데 갑자기 이상한 뉴스가 들리는 거였다.
"HP acquires Compaq for $25 billion."
내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전까지 Compaq 본사에서 일하다가 왔는데 갑자기 회사가 인수되었다니...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혼란스러웠다.
내일 아침에 빨리 출근을 해서 David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 9시도 되기 전에 회사에 일찍 나갔다.
한참이 지나도 David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Compaq의 구매 담당자에게 가서 물었다.
"저기... David가 나오지 않았는데 혹시 연락받은 거 있니?"
"David는 아마 앞으로 나오지 않을 거야."
"어? 그게 무슨 말이야?"
"뉴스 못 봤니? 우리 회사 어제 HP에 인수됐잖아.
HP가 엔지니어가 너무 많다고 해서 시니어급 엔지니어들은 바로 해고 통보를 받았나 봐."
"..."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게 말이 되나? 사람을 이렇게 바로 해고한다고?
그 날 이후 David는 회사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HP는 완전히 재무와 마케팅 중심 회사였다.
PC는 Commdity라서 자체 개발 없이 OEM으로 싸게 만든 후 마케팅만 잘 하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Compaq의 엔지니어링 리소스는 인수 직후 상당 부분 해고되었다.
덕분에 우리의 무선랜 비즈니스 구도도 완전히 바뀌었다.
HP는 훨씬 더 까다로운 Requirement를 주고 모든 걸 완료해서 납품을 하라고 했다.
함께 테스트하고 다시 개선하고 하는 프로세스 자체가 없어졌다.
그냥 시킨 대로 준비하여 납품하면 끝이고 품질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가 모두 책임을 져야 했다.
고객사의 전략 변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Compaq처럼 자기 기술로 할 수 있어야 진짜 경쟁력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HP가 Compaq을 인수하고 David가 회사를 떠난 후 깨닫게 되었다.
독보적인 기술력은 최고의 강점일 수 있지만
고객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기술은 오히려 최고의 약점일 수 있다.
원치 않는 기술에 투자된 비용을 고객은 가격으로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
2017년 Amazon이 고급 슈퍼마켓 체인인 Whole Foods를 인수했다.
온라인의 최강자가 오프라인으로 진출을 한 것에 유통기업들은 위협을 느꼈다.
당시 미국 IB업계에 있던 친구를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다른 백화점그룹이나 전통적 거인 유통기업들의 문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혹시 Amazon이 자기들을 인수할 의향은 없는지 비밀스럽게 알아봐 줄 수 있냐고...
기존 게임룰을 파괴하는 게임 체인저가 나타나면 산업은 요동친다.
독보적인 강자가 나타나 고착화되는 순간 더 이상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리 뭘 해도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당시 Amazon이 그랬다.
유통은 물론 물류, IT, 가전 등 모든 주변 산업의 포식자가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 Best Buy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Circuit City, Radio Shack 같은 전자제품 유통 강자들이 줄줄이 파산하던 상황이라
Best Buy의 선전은 더욱 놀라웠다.
Best Buy의 생존 비법은 경영학에서 나오는 이기는 전략의 정석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졌으나 Amazon은 갖지 못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고
그 결과 '물리적 공간'과 '사람'에 집중하기로 했다.
2017년 Best Buy는 세계 전역에 약 1600개의 Store를 운영 중이었고
그들은 Amazon이 갖지 못한 이 고객과의 물리적 접점에 집중했다.
그즈음 고객들은 Best Buy Store를 Amazon의 쇼룸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Best Buy에 와서 가전제품을 눈으로 확인하고 주문은 Amazon에서 했다.
Best Buy는 이를 역이용하여 Store를 눈으로 확인만 하는 쇼룸이 아니라 아예 체험공간으로 만들었다.
Store Layout을 제품군 중심에서 브랜드 중심으로 바꾸고
각 입점 브랜드들과 제휴하여 고객들의 체험 경험을 극대화했다.
고객들은 Best Buy에서 신제품을 먼저 만나고 스마트 기능이나 연결 사용신을 체험할 수 있었다.
동시에 주력 제품들의 가격을 Amazon과 똑같이 매칭해서 인하해 버렸다.
그러자 Amazon 구매를 위해 눈팅만 하던 고객들은 체험 후 현장에서 직접 구매하기 시작했다.
또 차별화 경쟁력의 한 축의 핵심은 사람이었다.
Amazon 온라인 서비스보다 Best Buy가 더 잘할 수 있는 건 대면서비스였다.
당시 많은 제품에 Network 기능, Smart 기능이 강조되면서 고객들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옵션들이 복잡해 모델 선택도 쉽지 않았고 주문한 상품이 집에 도착하면 세팅하는 것도 난감했다.
Best Buy는 Store마다 Geek Squad라는 이름의 전문가들을 수십명씩 운영했다.
고객들의 집을 방문해서 새로운 제품들을 세팅하고 연결해 주는 것은 기본이고
다양한 스마트 기능들의 사용법도 직접 시범을 보이며 알려주었다.
고장 난 제품은 수리해주기도 하고 그 집 환경에 최적인 상품이나 모델을 추천해 주기도 했다.
고객들은 든든한 기술 전문가 친구가 생긴 것이다.
온라인으로 파는 Amazon이 따라 하기 어려운 대면 서비스 모델이었다.
그 결과로 Best Buy 전체 매출의 1/4 이상은 Geek Squad가 만들어 냈다.
Amazon에 맞서는 새로운 생존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몇 년 후 Best Buy에게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코로나가 터진 것이다.
전 세계가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수십만 명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붐비는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더 이상 낯 선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던 Geek Squad는 하루아침에 일이 끊겨 버렸고
Amazon에 맞서 가장 큰 강점이었던 Offline Store가 Best Buy의 최대 약점이 되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Store들은 문을 닫게 되었고 전체 개수도 1200개 이하로 줄었다.
Bestbuy가 뭘 잘 못해서 그런 게 아니다.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비즈니스 환경이 변한 것이다.
반면 Amazon은 코로나 덕분에 유례 없는 성장을 거듭하게 되었다.
Offline Store 대비 몸집이 가벼운 Online 사업모델이 힘을 받게 되었다.
사람 대면 없이 신속히 문 앞에 배송해 주는 모델이 경쟁력이 되었다.
그 결과 코로나 이전 약 320조 원이었던 매출은 코로나 이후 3년 만에 600조 원으로 두 배 성장하였다.
다들 감원을 할 때 Amazon은 배송 직원을 오히려 50만 명 추가 채용해야 했다.
Amazon이 뭘 잘해서 그런 게 아니다.
원인 모를 바이러스 때문에 갑자기 운대가 맞은 것이다.
4년이 지나고 코로나가 거의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동안 밀렸던 대면모임과 쇼핑을 다시 시작했다. '보복소비' 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 번 경험을 한 고객들은 여전히 온라인 쇼핑을 편하게 사용하게 되었지만
코로나 때 급격히 늘려 놓은 인력이 Amazon에게 또 어떤 부메랑이 되어 날아올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Best Buy에게 또 다른 어떤 기회로 다가올지 모른다.
시간이 가면서 싸인 그래프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비즈니스는 그런 것이다.
기업의 궁극적인 생존은 고객의 선택만이 담보한다.
고객은 다양한 이유로 선택한다.
기술력, 물리적 공간, 사람, 시스템 등은 고객을 만족시켜줄 훌륭한 수단이긴 하지만
그것들이 있다고 고객이 반드시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들이 없다고 반드시 외면하는 것도 아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고객의 마음을 사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으면 된다.
때로는 최고 강점이 최고의 단점이 되기도 하고
최고 단점이라 믿었던 것이 버젓이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가졌으면 가졌기 때문에 이길 수 있고
갖지 못했으면 갖지 못했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