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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뜰에바다 Oct 12. 2024

인생은 락(樂)이다

십 대에 나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무작정 글이 좋았다. 글 속에서 행복을 누렸다. 물론 글날은 무디어서 남들과 겨룰 솜씨는 못 되었다. 많이 겨뤄보지도 않았다. 지금처럼 정보 시대가 아니니, 차근차근 문예 작법을 공부할 기회도 없었다.

세월이 흘렀다. 며칠 전, 새로 알게 된 어떤 선배가 뜻밖에 책을 주었다.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에세이가 아니었다. 소설이었다. 얼마나 정석으로 쓰였는지, 오랜 기간 갈고닦은 문장이 매끄러웠다. 작가가 되어 내가 글을 썼더라도 이 이상 쓰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와락 들었다. 아울러서 그녀가 그토록 잘 쓴 글을 책으로 엮었음에도, 누구도 그녀가 작가라고 여기지 못했을 만큼, ‘무명’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입장을 바꿔보았다. 어찌어찌하여 내가 글을 인정받고 문단에 데뷔하였더라도 대한민국에서 평생을 전업 작가로 살 수 있었을까? 십 대의 꿈대로 작품을 탈고한 후, 베란다에서 새벽에 뜬 하늘의 별을 보며 따뜻한 차를 마실 때, 언제나 행복했을까? 덩그러니 어떤 직업이나 섬김 공동체도 없이 고립되지는 않았을까?

  

지금, 나는  삶을 돌이켜 볼 때, ‘행복’이라는 단어를 퍼 올릴 수 있다. 하나 더 '감사'라는 말도 덧붙일 수 있다. 이상하게 다른 단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들어맞지도 않는다.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1799~1837)은 어떻게 젊은 날에 이것을 알고 노래했을까?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나는 십 대의 열망대로 살지 못했다. 처음 10여 년간은 의식 밑으로 밀어 넣은 그것이 떠올라, 한 번씩 명치끝이 아팠다. 그리곤 생각할 틈이 없었다. 매일 잠이 모자랐다. 억울한 사건도 있었다. 실망하는 일도 있었다. 사고도 있었다. 무릎 통증으로 오랜 시간 괴로움을 겪기도 했다. 그래도 고생이 아니었다. 불행은 더더욱 아니었다.


'행복'은 국어사전에 의하면,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다. 물론 행복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다. 그럼에도 인생은 기쁘고 행복할 때 의미와 가치를 다. 하여 자기 인생을 새롭게 다듬는다. 나아가 공공위한 '서로 사랑의 걸음' 걸음 내디딘다. 인생은 그렇게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학자들의 인생론을 살피지 않아 속에서 피부로 체득되는 것들이다. 그것을 김형석 교수는 105세에 쓴, 《백 년의 지혜》(21세기 북스, 2024)에서, '행복은 섬김의 대가'라고 명명한 후, 부연했다.

"인생의 아름다움은 선한 인생의 결실이다."

"이웃과 사회를 얼마나 사랑했고, 무엇으로 보답했는가는 생애의 유산이다."(24p)


내 행복의 근원은 어디일까? 번듯한 집 한 채 갖지 못하고, 인생 후반에 월세 원룸에 살면서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지몽매인가?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간과해서인가? 하여 무명작가 그녀의 소설을 다 읽은 후, 이틀간 도서관을 찾았다. 그녀의 소설이 나의 십 대의 열망에 마침표를 찍어주었거니와, 석학들은 인생을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톨스토이, 세네카, 카네기, 소펜하워, 헤세 등의 《인생론》을 들추었다. 덧붙여 앤드루 카노한의 《종교의 바깥에서 의미를 찾다》(한진영 옮김. 필로소픽, 2011)읽었다. '무신론자를 위한 인생 안내서'라는 전제가 붙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답이 아닌, 다른 것이 있는가? 눈을 크게 뜨고 보았다. 그러나 내가 아는 답 외의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한 말만 나열한 듯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슬퍼하고, 우리가 하던 일은 미완성으로 남을 것이고, 아이들은 더 이상 우리의 보살핌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일들은 행복한 미래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이 삶의 의미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가치 있고 귀중했다는 표시가 아닐까?"(39p)

     

그러고 보니, 김형석 교수도 젊은 날에 기독교가 자기 성실과 선함의 근간인지 의문스러울 가 있었다. 그래서 무신론 철학자의 저서들과 종교 없는 인생관과 세계관에 관심을 가졌다. 결과는 신앙 더 승화시켜 주었을 뿐이었다.

"신앙은 인간 성실성의 선물이나 결실이 아니었다. 성실성에 더해서 경건성이었다. 경건성은 우리가 모두 지니고 있는 성실함을 한 단계 더 높여준다. 반(反) 비(非) 성실함이 아니고, 성실을 내포하는 초(超) 성실이다."(144p)


그렇다. 인생은 어느 날, 대 우주의 시간표에 나만 모르게 등재된 후, 그 한평생은 내가 지휘하는 나의 이다. 그럼에도 어느 지점에서든 문득 돌아보면, 감사하고 행복하다. 매우 고통스러운 기억까지 미소가 된다. 가족과 이웃과 나라와 공동체를 위해서 충분히 사랑하고 살지 못했어도 마찬가지다. 하여 웅덩이와 수렁 같았던 인생의 굽이굽이까지도 종국에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귀결된다. 곁에 멘토 예수가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의 생각은 내 생각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크고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 함께라면 인생은 결코 고(苦)가 아니다. 락(樂)이다. 소확행 하는 그대들은 잘 알 것이다.


P.S.

2024년 10월 10일 저녁 8시, 대한민국의 작가 한강(1970~)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국가의 최대 경사요, 아시아 여성 최초의 쾌거요, 21세기 최연소 수상자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두고두고 환호할, 영예의 소식이었다. 작가가 놀란 것은 물론, 온 나라와 세계가 10일 밤부터 들썩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국 문학계의 판도도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작가 한강은 수년 전부터 자기 작품들을 번역해서 외국에 내놓아, 이미 영국 맨부커 상과 프랑스 메디치 상을 받았다. 제4세대 사실주의 작가로서, 고통스러운 조국의 역사나 인간의 악함을 단순하게 서술하지 않고, 환상을 곁들여 시적인 문체로서 슬픔 혹은 희망으로 승화시킨 결과이다. 스웨덴 한림원에서 한강 작가를 제124차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는 동시에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다. 자기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지배에 정면으로 맞서며,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그는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간의 연결에 대해 독특한 인식을 지니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되었다."

진실로, 인생은 락(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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