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무더위에 오랫동안 크게 아프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갑작스럽게 어머니를 하늘로 보내드린 후유증도 있었다. 죽음에 관한 생각 말이다. '차례를 받았다'라는 인식 말이다. 그것은 죽음이 두렵다거나 어디로 가는지 몰라서 허둥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자연의 섭리랄까, 인생의 무상이랄까.... 솔로몬이 인생 후반에 '곤고한 날'이 이르러서, 혹은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까웠을 때 느꼈던, '헛되고 헛되니 창조주를 기억하라'라고 고백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지난봄, 미국에서 30년 이상 사업하여 돈을 많이 번 어떤 남자가, 고국에 땅 사고 귀국하자마자 별세했다. 엊그제는 그 부인이 귀국하였는데, 요양원으로 직행했다. 인생 후반기를 맞이하여 외국 이민 생활을 접었지만, 건강이 모자라니 고국의 요양원으로 귀국한 것이다. 하여 그녀는 보는 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동시에 말하고 있었다.
죽음에는 서너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건강하다가 어느 날 갑작스러운 와병으로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다. 젊거나 어린 사람들이 아니라면 꽤 복된 죽음이다
둘째는, 건강하지는 않았지만, 약물로 다스리던 지병이 악화하여 급히 응급실을 찾아서 치료 중에 혹은 치료 후 얼마 안 되어 죽음을 맞는 경우다. 이 경우도 복된 죽음에 속할 수 있다.
셋째는, 불치병 등 지병으로 신체는 현저하게 저하되고 통증에 시달리나, 정신만은 또렷한 가운데 서서히 맞이하는 죽음이다.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존엄하게 죽고 싶은 소망이 다분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경우다.
기타, 다른 죽음들도 있다. 아우슈비츠 같은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가 먼지처럼 사라지는 경우, 전쟁 중에 전사하는 경우, 교통사고 등 각종 사고로 뜻밖의 죽음을 맞는 경우 등등 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 박사(1905~1997)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이시형·김혜림 옮김. 청아출판사, 2023)는 많은 의미를 우리에게 선물한다. 그토록 혹독하고, 제정신을 잃을 수밖에 없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할 의미를 찾고, 종국에는 실존 심리학의 '의미 요법(logo therapy)'을 창안하다니.
그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은 성자처럼 행동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만든 존재다. 반대로 사람은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세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가지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선택하는 것은 완전히 자기 의지이다.
의미 추구는 성장과 정신건강의 열쇠다. 프랭클 박사는 발진티푸스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던 강제수용소에서 3년 만인, 1945년 풀려났다. 그리고 자신이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임신한 아내, 부모님과 동생도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그럼에도 수용소에서 풀려나자마자,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정신과 의사로서 고향 오스트리아 빈의 종합병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이 회상되는 그 자리를 피해 인근 나라로 떠난 것과는 다른 선택이었다. 고향을 사랑하는 의미가 있었다. 한 가지 더 추론한다면, 극한 상황에서 보았던 동족들의 내면을 지극히 평범한 생활 속에서도 어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이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으면, 스스로 퇴행하며 과거를 쫓게 된다.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사실처럼 보지 않으려고 과거를 떠올린다. 그러나 지금 있는 현실을 보지 않고 피하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것을 얻을 기회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이런 ‘일시적인 삶’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삶의 의지를 잃게 된다. 자신 앞에 있는 모든 일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빅터 프랭클 박사의 의미 요법에 의하면, 사람의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 주어진 고통 가운데서 의미를 발견하면 그것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아무리 크고 힘겨워도 그 고통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면 누구든지 당당히 마주해서 꿋꿋이 버텨내고 이길 수 있다.
고통만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인생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만큼, 풍요롭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만큼, 사랑하고 산다. 많은 경우, 그 의미는 '신과 함께 사는 사람'에게서 더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그 의미는 현세뿐 아니라 다음 세상까지 이어진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구태여 종교 때문에 고통을 이겼고, 의미 요법을 창출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서는 그의 종교가 의미요, 선함으로 고통을 이기고, 주어진 현실을 수용하는 힘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던져진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은 던져진 만큼 살다가 죽는다. 사람이 최고 사랑의 대상인 것을 믿는 사람은 그 의미와 사랑만큼 살다가 죽는다.
소확행을 꿈꾸는 이들이여! 열심히 살다가 한순간 몸살이 나서 주저앉을지라도, '사랑'이라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잊지 말라. 그것이 쓰러졌다가도 다시 독수리처럼 하늘로 비상하는 힘의 근원이다. 그것이 이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고 사는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