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월은 십자가를 묵상하는 계절이다. 부활절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어떻게 믿었을까? 어떤 정신의 과정을 거쳐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이 생긴 것일까? 기독 교회에 발을 내딛는 순간, 하늘로부터 믿음이 한 아름 내려와서 그것을 받아 믿게 되었을까? 맞는 말이다. 꼭 교회에 발을 내딛는 순간은 아니지만, 믿음이 하늘에서 선물로 내려온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기름 부음'이라고 한다(요일 2:20).
예수가 생전에 첫 제자들에게 십자가 수난을 세 번 예고했다(막 8:27~33, 9:30~32, 10:32~34). 그때 예수의 첫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하기 전까지,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것을 성경은 십자가가 그들에게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눅 18:34).
그럼에도 1세기, 같은 공간 유대에서 '마리아'는 십자가를 알았다. 그녀가 십자가를 알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의 해석 때문이다.
예수가 베다니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죽었다가 예수로 살아난 나사로와 동생들이 사는 곳이었다. 나사로와 동생들이 예수와 제자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그때 나사로의 막냇동생 마리아가 시집갈 때 가져갈 아주 값진 나드 향유를 꺼냈다. 곧 잔치 자리에 들어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었다. 향기가 진동했다. 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책망했다. 그때 마리아를 대신해서 예수가 말했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요 12:7~8)
실로 예수 십자가와 부활이 어떤 이에게는 감춰져 있다. 다른 이에게는 열려 있다. 따라서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신의 영역이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할 수 없어 기독교 문지방을 넘지 못한다. 당연하다. 반대로 그 문지방을 넘은 사람들을 향해 '미쳤다'라고 말한다. 역시 당연하다.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이해할 수도, 만질 수도, 믿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상한 것은 보려고 하고, 만지려고 하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보인다. 그래서 마음이 먼저다. 마음이 먼저 열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어떤 사람이 감정의 아픔과 폭발로 엎드렸든, 십자가의 허구를 꼬투리 잡으려고 삿대질로 엎드렸든, 더 이상 피할 데가 없어서 손들고 엎드렸든, 마음이 있는 거기에 신의 기름 부음이 있고, 그것이 믿음이 된다. 또한 구원이다. (박해자 바울의 기름 부음은 오고 오는 세대 속에 가장 극적일 것이다!)
영화로 더 잘 알려졌지만 소설 《벤허》 작가 누 월리스(Lew Wallace, 1827~1905)는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승승장구한 작가, 변호사, 장군, 주지사였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반기독자는 아니었다. 다만 기독교에 무관심했다. 어느 날 당시 미국에서 유명한 불가지론자였던 로버트 잉거솔 대령과 우연히 같은 기차에 동승했다. 잉거솔이 월리스 앞에서 하나님, 천국, 지옥, 내세 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때 월리스는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그것을 계기로, 그가 기독교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다. 그것이 '벤허'로 태어났다. '벤허'는 1880년 출판과 동시에 2백만 부 이상이 팔렸다. 1936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출판될 때까지 50년이 넘도록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벤허'에서 월리스는 주인공 유다 벤허와 예수와의 만남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서미석 역. 현대지성, 2016)
"자기 또래로서, 노란 기가 도는 밝은 밤색 머리칼이 드리워 있었다. 짙푸른 두 눈이 빛나고 있었는데, 그 순간 그 눈길이 어찌나 부드럽고 매력적이며 사랑과 거룩한 목적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 모든 사람을 무장 해제시킬 힘이 담겨 있었다. 밤낮으로 겪은 고통으로 마음이 차갑게 굳어져 있었고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원한에 사로잡혀 적의에 불타던 유다의 마음은 그 낯선 이방인의 눈길에 녹아 버려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유순해졌다. 유다는 물사발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두 사람 모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유다가 물을 다 마시고 나자, 청년은 유다의 어깨에 올려놓았던 손을 흙먼지 더부룩한 머리로 옮겨 짧게나마 축복해 주었다."
마지막은 유다 벤허의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그린다. 월리스 자신의 변화를 책에 담았을 것이다.
"혹시 로마를 방문해 산 세바스티아노의 카타콤베보다도 훨씬 오래된 산 칼릭스토의 카타콤베를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벤허의 재산이 어떻게 쓰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 거대한 지하 교회에서 태동한 그리스도교가 마침내 황제들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으니."
나는 스물두 살 때 또래들과 소그룹 예배를 드리면서 십자가를 새롭게 보았다. 제대로 교회에 출석하며 기독 세계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을 즈음이다. 목사님이 십자가를 설교했다. 그때 말속의 십자가가 내 가슴에서 실제적인 통증을 일으켰다. 그 통증이 꽤 길어서 예배가 마칠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다. 내 이성의 영역 밖에서 신의 기름이 부어진 순간이었다.
물론 예수 십자가가 너무 끔찍해서 감정적으로 통증을 느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후에 내가 십자가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한 인간을 죽인 형틀이요, 수치가 아니라, 전 인류를 대신한 속죄였음을 알았다. 그것은 초등학교 6학년 어떤 날에, 갑자기 '내가 다 컸구나!'라는 자각이 와서 잠깐 멈칫했던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십자가가 사람의 생각이나 말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슴과 실존에 실제가 된 것이다. 신비가 아닐 수 없다.
그대는 십자가를 아는가?
십자가를 믿는가?
그대는 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