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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

by 뜰에바다

우리는 유혹의 시대를 살고 있다. 역사 이래 오늘날처럼 여러 방면에서 다량으로 많은 것들이 우리를 유혹하는 시대도 드물 것이다. 돈, 술, 이성, 마약의 유혹은 옛 유물이다. 21세기에는 거기에 더하여 게임과 미디어 과용.... 과자, 빵, 콜라, 설탕까지 달콤한 유혹자가 되었다.

유혹을 받으면? 중독으로 넘어간다. 중독이 되면 웬만해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병이 들거나 노예로 살거나 때로 폐인이 된다. 그럼에도 유혹이 '몸'으로 나타나는 것 외에 '영'에 대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간과할 때가 많다.


대체 누가 유혹을 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이 세상 공중 권세 잡은 '속이는 영(마귀, 귀신)'이다. 그의 목적은 크게 인류 멸망이다. 작게는 누구든지 자기 손아귀에 넣는 것이다. 2천 년 전, 예수를 유혹했던 것도 그다. 바리새인으로, 서기관으로, 대제사장으로, 가룟 유다로, 본디오 빌라도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모두의 생각 속에 공통으로 그가 있었다. 그의 유혹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계속되었다. 포기할 법하지 않은가? 죄 없는 자를 이미 손아귀에 넣어 십자가에 처형했으니? 아니었다. 한순간도 한눈팔지 않고 유혹하는 것이 그의 존재 이유다. 그는 골고다에서조차 유대 지도자들의 독설로, 로마 군병들의 롱으로, 함께 못 박힌 강도의 저주로 예수가 넘어지도록 유혹했다. 없는 일로 유혹받으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할 있는 일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 하는 유혹은 더 견디기 힘든 법이다. 골고다의 유혹이 그랬다. 그것은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지기를 결단하며 겪은 고통보다 작지 않았다.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을 성경대로 스크린에 담아 '영상 신학'이라 불릴만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미국, 멜 깁슨 감독. 짐 카비젤 주연. 2004년 개봉, 2025년 4월 2일 재개봉)를 보라. 그는 예수 옆에 붙어서 섬뜩하게 따라다니며 예수를 괴롭히지 않는가!


여러분은 달콤한 당류가 내 몸에 들어왔을 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얼마나 빠르게 나를 사로잡는지, 잘 알 것이다. 입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으면서 나를 황홀경에 빠뜨린다. 순식간에 과식이 되고, 소화불량이 되며, 콜레스테롤이 되고, 당뇨가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 순간은 소용이 없다. 완전히 사로잡혀 스스로 제어할 힘을 잃고 폭풍 흡입하게 된다. 당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

18세기만 해도 설탕은 서양에서 부자들만 먹을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그때 설탕은 철저한 보안이 필요할 만큼 값이 비쌌고, 자물쇠가 달린 '설탕 보관함'을 사용할 정도였다. 2세기 후, 설탕은 보편화되어 지구 모든 이들의 입맛을 유혹하고 사로잡았다. 수많은 변이를 일으키며 급속하게 진화했고, 인류는 원하지 않았으나 모두 설탕의 포로가 되었다. 지금 식료품 중에서 당이 들어가지 않은 제품이 있는가? 당이 들어가지 않은 음료와 식품은 맛이 없어 먹기 어려울 지경이다.


하여 현재, 각국에서 당 중독을 경고하고, 비만과 당뇨, 심혈관질환의 주범으로 낙인찍었다. 그럼에도 당류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건재할 것이다. 이성으로는 당 섭취를 줄여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미 당에 유혹당한 사람의 각 체내는 당이 있는 한 저절로 입을 벌리기 때문이다.

"식사하다 배가 부르면, 일반적으로 식욕 호르몬이 분비되어 우리 뇌에 그만 먹으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과당은 이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음식을 그만 섭취하라.’라는 호르몬을 촉발하지 않는 과당은 식욕 통제 역할을 하는 뇌에 발각되지 않은 채 우리 체내로 숨어 들어간다. 바로 이것이 포만감 없이 사탕이나 과자를 과도하게 먹을 수 있는 이유다."(캐서린 바스포드. 《설탕, 내 몸을 해치는 치명적인 유혹》. 신진철 역. 원앤원스타일, 2015)


'내가 예수와 멀리 떨어져 사는 것', 그것도 혹시 내가 그에게 유혹받아 완전히 사로잡혔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 예수를 아는 이들은 게으름으로, 아직 예수를 모르는 이들은 무관심으로 말이다. 유혹자, 그는 예수만 따라붙는 존재가 아니다. 내 몸을 나도 모르게 사로잡은 당류처럼 내 영을 유혹하는 그는 내가 전연 눈치채지 못하도록 속임으로 내 곁에 머문다.

그는 나를 교묘하게 지배할 수 있다. 그는 나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무신론이나 유물론, 나르시시즘으로 채울 수 있다. 마음이 시리거나 아파서 우울감에 놓이면 나를 알코올이나 약물로도 메울 수 있다. 마치 당이 내 안에서 나를 사로잡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학교에 갔을 때, 나는 거의 한 학기 동안 기숙사에서 가위눌림을 당했다. 매일 밤, 잠들기 직전에 어김없이 검은 유혹자 대여섯이 내 목을 조르고, 팔다리를 짓눌렀다. 그들은 내가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를 선포하기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예, 예, 예수라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이것이 돕는 이의 기름 부음이다) 그때야 쏜살같이 도망쳤다. 학기가 무르익어 소용없다고 여겼을 때야 그들은 더 이상 나를 넘보지 않았다.


여러분이여, 아직 내 존재의 영역에 예수가 자리하지 않았음에도 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이미 내 영혼이 유혹의 한가운데에 있을지 모른다. 굽이굽이 인생을 살면서 기다리는 이에게 돌아설 기회가 많았음에도, 아직 돌이키지 못한 것 역시 유혹자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을 사모하며 십자가의 생명으로 안식을 얻는 존재니까. 그것은 무신론자, 유물론자, 불교도.... 누구든지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지는 순간, '아이고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것이 증언한다. 여러분이여, 유혹자를 감지하라. 유혹을 물리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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